미투의 익명과 실명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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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의 익명과 실명 사이

'미투'는 어느날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미투는 오래 전부터 있었고, 발화되지 않은 미투는 훨씬 더 많다. 미투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과 사회의 주목이 없었을 뿐이다. JTBC 뉴스룸에서 서지현 검사가 출연해 신분과 얼굴을 공개하며 '미투'를 한 것은 대단한 용기이고, '미투' 운동의 변곡점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 뒤로 이른바 '실명과 얼굴을 깐' 미투는 언론과 우리의 주목을 끌었고 많은 이들을 분노하게 했다. 그리고 우리는 은연중 또는 고의로 '실명' 미투에 더 많은 신뢰를 보내고, '익명' 미투에는 상대적으로 작은 관심과 신뢰를 갖게 되었다. 심지어 '익명' 미투를 한 피해자에게 실명과 얼굴을 공개해야 믿어주겠다는 희한한 협박(?)을 하는 무리도 있다.

실명과 익명의 차이로 미투의 진실성을 가리거나 피해자의 상처와 고통을 가늠할 수 있다는 생각은 가해자의 논리에 가깝다. 비단 미투 뿐 아니라, 내부고발이나 첨예한 논쟁, 진실을 다투는 사안에서 실명 공개하라는 요구는 주로 강자나 가해자, 범죄자의 주효한 반격이었다. 익명은 늘 피해자나 약자의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실명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진실성과 신뢰성을 의심받아야 했다. 강력사건 같은 법률에 규정된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범죄 피의자조차 익명으로 다뤄지는 게 우리의 인권상식이다. 그런데 유독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가해자가 아니라!)의 실명에 집착하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JTBC 뉴스룸의 연이은 피해자 생중계 인터뷰 방식을 통한 '실명' 미투는 '미투'의 파급력을 놀라울 정도로 확대했다. 하지만 피해자를 전면에 내세우는 '실명' 미투여야 신뢰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게 한다는 점. 그리하여 수많은 익명 미투를 대중의 관심 밖으로 밀어내며, 나서지 못하는 무명 피해자들의 미투 의지를 꺾을 수 있다는 점을 지나칠 수 없다. 한국사회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사실관계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술하고, 실명은 물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서 진실을 입증하도록 내몰아왔다. 그리고 사소한 오차라도 밝혀지면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너무나 쉽게 단정해버렸다. 피해자를 정당하게 보호하고 존중한 경험이 미천한 사회에서 실명이냐 익명이냐는 잣대로 피해자를 재단하는 것은 참 염치도 없는 것은 물론 또다른 폭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