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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너머를 상상해

혈연 중심의 가족제도는 불합리하다. 가족의 맹목성은 폭력과 다를 것이 없다.

가족이기 때문에 불합리한 것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
가족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상처받기도 하고 이해불가를 선언하기도 한다.
가족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용서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을 일이 많다. 이러한 맹목성은 사회적 산물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혈연이라는 생물학적 근원을 갖고 있다.
혈연은 선택이 아닌 운명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에 이미 불합리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가족의 맹목성과 당위는 누군가에게는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다. 내가 한국의 TV드라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가족주의적 가치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다.(가족 이야기가 아닌 드라마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가족은 그 자체로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혈연중심 가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특히 가족이기주의라는 변종 이데올로기화 되는 순간에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가치는 위기를 맞는다. 가족이기주의는 대체로 혈연 가족과 그 밖을 경계짓는다. 이 경계 안에서 가족은 경쟁적 삶의 논리를 체화한다.
내가 보기엔, 이른바 '가족의 위기'는 전통적 가치가 허물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혈연중심 가족주의가 가부장적 권위, 성이나 나이에 의한 위계와 차별 체계, 강자와 약자의 분리 등을 통해 유지해온 지배와 억압관계야말로 가족의 가치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히려 혈연의 해체를 통해 새로운 가족 구성을 상상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적 가치는 혈연의 강화가 아니라 그것의 해체를 통해서 발전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나는 세 편의 영화를 좋아한다.

<가족의 탄생>, <다섯은 너무 많아>, <메종 드 히미코>

특히 <메종 드 히미코>는 가족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코믹하게(유치하기까지 하다!) 드러내고 있다.
어느 날 자신의 성정체성이 게이임을 발견한 아버지. 아버지는 딸과 아내를 떠난다. 세월이 흐른 후 몹쓸 병에 걸린 아버지는 딸을 찾는다. 아버지의 곁에는 잘 생긴 남성이 연인으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용서할 수 없다'는 딸의 말에 아버지는 담담하게 말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로서 용서를 구할 것이라는 나의 척박한 상상력을 탓하자.

다음 장면은 더욱 기가 막힌다.
할말을 잃은 딸에게 아버지는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한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둥!
진지한 상황에서 나는 폭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진지할 수 있을까. 만약 아버지가 딸에게 용서를 구하고, 딸은 눈물을 흘리며 용서하는 장면이었다면 아무런 여운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혈연 가족이라고 해서 다 덮어두고 화해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너를 좋아해'라고 할 수는 있다는 것.
게이의 삶을 선택한 것과 딸을 좋아하는 것은 별개의 삶으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이를 분리시키는 것이 혈연중심의 가족주의일 것이다. 게이의 삶과 혈연 가족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 이 잔인한 상황. 아버지는 전자를 선택했고, 그렇다고 아버지라는 이유 때문에 용서받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이 정도면 훌륭하다.

나는 가끔 가족 너머를 상상한다.

사진 잘 찍는 사람, 음악적 재능이 있는 사람, 유머러스한 사람, 요리 잘 하는 사람, 그리고 잘 하는 게 없는(본인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런 사람들과 한 지붕 아래에서 살면 재미있지 않을까.

당연히 평생동안 같이 살 필요는 없다.
능력껏 참여하고, 필요에 따라 취하면 된다.
그리고 서로 좋아한다는 합의만 있으면 된다.
필요한 것은 공동의 수고를 통해 해결하면 된다.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