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를 '나'라고 말한다는 것

말은 사회적 산물이다.
그 사회의 구조와 통념이 반영되지 않은 말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

군사독재정권은 '곧 전향할 것'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는 '미전향 장기수'를 고집했다. 이 말은 나중에 '비전향 장기수'로 바로 잡혔다.
결혼을 당위나 의무쯤으로 전제(이건 폭력!)해버리는 '미혼'이라는 말은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존중하는 '비혼'으로 바꿔 쓰인다.
불안정감을 주는 '편부모' 대신에 '하나로도 완전하다'는 의미의 '한부모'가 쓰인다.
당하기만 하고 약하다는 느낌을 주는 '피해자'는 폭력에 대항해 살아남은 적극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생존자'로 대체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대인관계에서 쓰이는 호칭도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호칭은 관계의 성격을 반영하고, 지위와 연령, 성별 등 위계와 힘의 관계를 드러내준다. 상대의 직함을 부르는 것은 얼핏 객관적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와 관련해서 김규항은 좋은 글을 썼다. 일독을 권한다.
선생님과 사장님

상대방에 대한 호칭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자신을 이를 때 쓰는 호칭에도 일정한 권력의지가 내포돼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자신보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서 하는 말.
"누나야." 또는 "오빤데." 또는 "형이야." 또는 "언닌데."
(특히 남성들의 경우가 심한 편이다.-고 생각한다.)

이런 예는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형은 이게 좋은 것 같아." 또는 "언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기타등등.
(가끔 이런 식으로 자신을 지칭하는 말을 들으면 나는 우습다. ㅎㅎ)

나이뿐만 아니라 신분관계나 위계를 드러내는 호칭도 많다.
"선생님은 너희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또는 "엄마는 우리 아들을 사랑한다."
내용만 보면 참 따뜻한 말이다.

그런데 나를 '선생님'이라고 자칭하는 순간, 상대방은 '학생'이 되고, 개인과 개인이라는 평등한 관계이기보다는 교사와 학생이라는 위계가 성립한다. 윗 자리에 있는 교사에게는 별 느낌이 없을 수 있지만, 아래에 있어야 하는 학생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느낌이 없을 수 없다.

해결방법은 무척 간단하다.

나를 '나'라고 말하면 된다.

"나는 너희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어."라고 하면 되는 것이다.
전화를 걸었을 때 "나야." 또는 "아무개야."라고 하면 되고, "나는 이게 좋은 것 같아."라고 하면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라고 하면 되고, "나는 우리 아들을 사랑한다."라고 하면 된다.

굳이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하지 않더라도 당신이 선생님이라는 사실은 학생들이 다 안다.
'형', '오빠', '누나', '언니'라고 스스로 강조하지 않더라도 그 사실을 모르는 동생은 없다.
게다가 설마 엄마를 몰라보는 아들이 있을까!

나를 '나'라고 말하는 것은 평등하고 민주적인 대화법의 기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