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약자들의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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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약자들의 연대

*주의! 아래 글에는 영화 <괴물>에 대한 스포일러가 가득합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은 읽지 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영화 <괴물>은 장르로 따지자면 괴수영화에 속하겠지만, 분명히 정치적 영화다. 그것도 매우 정치적인 영화다.
미군이 한강에 방류한 독극물이 돌연변이 괴물을 탄생시켰다는 설정, 검증되지 않은 세균전 무기를 엄연한 주권국가인 대한민국 땅에서 멋대로 사용하는 뻔뻔한 미국. 이 정도 설정을 가지고 <괴물>을 반미영화라고 딱지 붙이는 것은 오히려 민망한 일이다.

봉준호 감독의 국가와 공권력에 대한 조롱은 이미 <살인의 추억>에서 그 실력이 입증되었다. <살인의 추억>은 '조롱'은 보여줬지만, 그 이후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었다.

<괴물>은 조금 다르다. 아니 확실히 <괴물>은 '조롱'에서 만족하지 않고 분명한 이야기를 한다. 나는 그것을 '약자의 연대'라고 부르고 싶다.
막강한 인원과 힘을 가진 국가 공권력은 약자들의 이야기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들 멋대로 단정짓고 무시하고 외면한다. 영화에서 강두(송강호)가 아무리 '내 말 좀 들어보라'고 발버둥쳐도 국가로부터 '바이러스에 오염돼 헛소리 하는 얼간이' 취급을 당할 뿐이다.

국가는 약자들에게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무능력하다. 바이러스 오염을 막는다며 합동분향소에서 난리법석을 떨며 강두를 특수격리장치에 넣어서 병원으로 후송하지만, 결국 병원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사람들과 뒤섞여 있다.

자신들의 말은 듣지도 않고, 게다가 무능력하기까지 한 국가에 기대할 것이 없는 약자들은 스스로 나선다. 현서(고아성)를 구하기 위해 무언가 하자 있는 약자들은 사제 총으로 무장하고 괴물을 찾아 나선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경찰이 강두에게 걸려온 현서의 이동전화 위치추적을 해서 간단히 현서의 위치를 파악하고 구조할 수 있다. 아주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덜 떨어지고 사악한 국가 공권력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힘이 약자에겐 없다. 국가가 해결해야 하고 간단히 그럴 수 있는 문제에 약자들은 직접 목숨을 걸고 나서야 한다. 이게 바로 세상의 부조리다.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오지만, 정작 인민이 필요로 할 때 국가는 딴짓만 한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TV에서는 '정작 필요한 뉴스는 나오지 않는다'.

결국 약자들은 스스로 연대하여 문제 해결에 정면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록 일상에서는 별 볼 일 없는, 평균 이하의 군상들이지만 덜 떨어진 국가보다는 훨씬 정의롭고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괴물에게 붙잡혀간 현서. 가장 위험에 처한 약자이지만 자신보다 더 어린 남자 아이가 붙잡혀 오자 현서는 그 아이를 보호한다. 약자는 자기보다 더 약한 자를 보호할 줄 안다.

그러나 일부 약삭빠른 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등을 치기도 한다. 한 때 '데모'를 좀 한 대졸 백수 남일(박해일)은 현서의 이동전화 위치추적을 위해 이동통신 회사에 근무하는 선배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 선배는 포상금을 받기 위해 경찰을 사무실에 대기 시켜두었다.

한편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다가 쓰러진 남일을 일면식도 없는 노숙자가 재워준다. 남일은 노숙자의 주변에 쌓여 있는 소주병을 보고는 화염병을 만들 생각에 가방에 소주병을 집어 넣는다. 남일은 노숙자에게 '그래도 돈은 준다'며 지갑을 꺼낸다. 하지만 노숙자는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나...'라며 소주병으로 남일의 뒷통수를 갈겨버린다. 모든 것을 화폐화하는 자본주의의 거래방식에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이는 듯 한 기분.

결국 일면식도 없는 노숙자는 남일을 도와 화염병을 만들고 괴물과의 대결에서 휘발유를 괴물에게 쏟아붓는 공헌을 한다.
일면식도 없는 노숙자가 무능한 국가보다 낫다.

<괴물>은 괜찮은 오락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재미있어야 한다'는 봉준호 감독의 평소 신념을 신뢰해도 좋다.

* 휴가를 맞아 광주에 온 친구 이상윤이 영화 <괴물>을 보여줬습니다. 고맙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