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 화려한 흥행, 초라한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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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 화려한 흥행, 초라한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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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화려한 휴가>를 봤다.
너나 할 것이 모두가 봐야 할 것처럼 떠들어대는 세태가 불편해서 일부러 극장을 찾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 주 용봉대동풀이 기간에 학교에서 무료상영하는 행사가 있어서 보게 되었다. (공짜는 좋은 거다! 대부분.)
미디어와 주변의 지인들을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워낙 많이 들었던 터라, 특별한 기대 같은 건 없었다.
줄거리가 전혀 모르는 내용인 것도 아니고.
영화를 감상한다기보다는 그저 어떤 사회적 현상(?)에 동참한다는 의미가 더 컸다. 게다가 공짜인데 굳이 피할 이유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분노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걱정 반 기대 반 심정도 있었다. 왜냐하면 많은 대중들이 그러한 정서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이야기가 갖고 있는 진실의 힘인 경우도 있겠지만, 감정조작이나 영화기술적인 감정동원의 결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5·18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형식은 심하게 신파였다. 불편하고 지루하며, 간혹 역겨운 순간까지 느낄 정도로.
아주 차갑게 말하자면, 이 영화는 7백만명이나 봐야 할 필요는 없다.
중딩이나 고딩이라면 추천해줄만 하다. 왜? 최소한 그러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아야 하니까.
영화 <화려한 휴가>에게 줄 수 있는 가치는 여기까지다. 중·고딩을 위한 역사학습자료.


1.
도청 앞 첫 집단발포 장면. 도청 앞으로 몰려드는 시민들. 공수부대와 대치하던 중 걸죽한 입담이 오가며 분위기는 들떠 있다. 그 순간 애국가가 울려퍼지고, 시민들의 표정은 진지하게 바뀌면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다. 그리고 공수부대는 그들을 향해 집단발포를 한다. 애국가가 울려퍼지면서 집단발포가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감독은 왜 '국기에 대한 경례'라는 픽션을 집어넣었을까? '빨갱이'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자들이라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강박이었을까. 항쟁을 국가주의의 틀 속에 가둬버리거나 경직된 이념으로 바라보는 것은 나쁜 짓이다. 여기서 어떠한 '정치적 의도'까지 읽혔다면 나만의 오바일까. '범여권'의 대선 예비후보들이 이 영화를 앞다퉈 관람하는 정치적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2.
항쟁 마지막 날 도청 사수 전야. 시민군을 이끄는 역할로 나오는 예비역 장교 출신 안성기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시민군들 앞에서 연설을 한다. 연설이 끝나자 이름 없는 인민들은 환호를 지른다. 대장의 연설에 환호성을 지르는 장면은 TV드라마 사극 따위에나 어울린다. 도청에 끝까지 남아서 목숨을 바치고,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한 이름없는 인민들을 묘사하는 방식이 이토록 유치하고 경박해서는 안된다. 내가 보기에, 5·18 민중항쟁이 간직하고 있는 역사성의 정수는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아 있던 이름 없는 인민들의 존재에 있다. 그들의 존재는 80년대 이후 이른바 '민중의 힘'의 실체에 대한 지식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진지하고 진실되게 묘사되었어야 하는 장면이 바로 도청 사수 전야다. 그런데 유치한 환호성으로, 억지스런 감정동원으로 망쳐버렸다. 끝까지 신파에만 의존한 것이다.

3.
5·18 민중항쟁을 주도한 것은 지식인도 아니고, 대학생도 아닌, 평범한 인민들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5·18 민중항쟁이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마어마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인민들을 그리는 방식은 불쾌했다. 결정적으로 이 영화는 인민들을 너무나 단순하게 그리고 있다. 그들이 어떻게 항쟁에 참여하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실하기 짝이 없다. 특히 서울말을 쓰는 희한한 전라도 사람들인 김상경과, 이요원, 안성기의 말에 전라도 말을 쓰는 전라도 인민들은 너무도 충실하다. 그들의 말에는 절대복종이다.

4.
형의 바람대로 서울대 법대를 가겠다는 고등학생 이준기. 택시 운전하는 형 김상경과 단 둘이 살면서, 공부도 잘 하고, 놀 줄도 알고, 성격도 쾌활하다. 친구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 이준기는 학교에서 시위를 주도한다. 공부도 잘 하는 학생이 시위까지 주도하는 것은 좀 그렇다. 그러니까 너무 잘난 고등학생 캐릭터는 이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다. 김상경은 평범한 택시 운전사, 이요원도 평범한 간호사인데, 왜 유독 이준기는 평범하지 않은 고등학생이어야 하나. 게다가 당시에 항쟁에 참여하고 학살당한 고등학생들 중에 '공부 1등'이 몇 명이나 있었겠나. 그리고 이런 영화에서까지 '학교 성적'이 주요 요소가 되는 캐릭터를 봐야 하는 걸까.
앞에서 이 영화의 유일한 가치를 '중딩&고딩 역사학습자료'라고 말했는데, 잘난 고등학생 캐릭터의 존재는 점수를 많이 깎아 먹는다.

5.
이 영화는 상업영화다. 수익이 주요한 목표인 영화다. 기본적으로 그런 의도를 가지고 제작된 영화다. 이걸 굳이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 한국은 영화매체가 체제의 선전과 인민의 계몽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하는 사회는 아니니까.
이 영화가 대중성과 상업성을 가장 염두에 두고 제작된 영화라는 점을 감안할 때, 다큐멘터리처럼 엄격한 리얼리즘을 요구하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항쟁의 정치적 의미를 전면에 내세우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18 민중항쟁을 정면으로 다루는 영화이기 때문에 허투루 만들어져서는 안된다. 물론 5·18 민중항쟁을 신화화해서도 안되겠지만,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것들이 비교적 엄격하다는 것이다. 특히 이름 없는 인민들에 대한 관점을 세우는 것은 진지한 성찰과 완성도 높은 학습에 기반해야 하는 작업이다. 복잡한 사회과학과 인문학이 필요한 일이다. 5·18 민중항쟁은 권선징악으로 단순화해서 말할 수 없다. 그래서는 안된다. 어설픈 신파에만 의존해서 '정신'마저 훼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삼았더라도 <화려한 휴가>는 상업영화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픽션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흥행에 대한 욕망으로 인한 역사 왜곡까지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니다. 사실을 감추거나, 거짓을 꾸미는 것만이 왜곡인 것은 아니다. 부실한 학습과 모종의 정치적 의도에 의한 어설픈 재현도 인민들에게 역사적 가치에 대한 혼란과 고정된 의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왜곡이다.

6.
이 영화에 대하여 아쉬움과 불만을 갖는 많은 이들은 영화감독 켄 로치를 떠올렸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영화를 보는 내내-솔직히 영화를 보기 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켄 로치가 떠올랐다. <화려한 휴가>의 감독이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한 1백번 정도 보고 영화를 만들었다면 뭔가 좀 달라졌으려나.
어떤 면에서 <화려한 휴가>는 이전에 5·18 민중항쟁을 다룬 영화 <꽃잎>이나 <박하사탕>, 드라마 <모래시계>보다 후퇴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회적, 정치적 환경도 발전하고, 제작 조건도 훨씬 나아진 상황에서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지 못했다는 것은 후퇴와 다름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건을 현재에 재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적 기억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좋은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기억만 하고 있어야 하는가. 기억을 넘어 해석과 논쟁이 필요하다.
물론 '일해공원'을 둘러싸고 벌어진 합천에서의 희극(희극에 대해서는 웃고 넘어가면 된다. '그냥 그렇게 사세요'하면 된다. 희극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도 엄연한 한국사회의 현실이긴 하지만, 이것이 여전히 재현이 중요하다는 틀에 갇혀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사건을 통해 논쟁점을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현재의 모순을 성찰하게 만드는 켄 로치의 재능이 앞으로 5·18 민중항쟁을 다룰 영화들에게 좋은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7.
5·18 민중항쟁의 주체이자, 역사적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광주가 민주, 인권, 평화 어느 것에도 충실한 도시가 되지 못하는 이유. 선거철이 되면 습관적으로 '정치의식이 높은 도시'로 칭송을 받는 불쾌함. 현재 광주의 비루한 모습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촉구하는 용기 있는 영화의 등장은 요원한 일일까. 언젠가 故 윤한봉 선생님을 닮은 5·18 영화가 제작돼 관객 1백만명만 동원한다면, 그 자체로 한국사회가 진보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8.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아들을 잃은 시각장애인으로 분한 나문희의 연기였다. 영화를 보면서 딱 한번 울컥 했는데, 아들의 시신을 손으로 만져보고 자기 아들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나문희의 연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