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단일화는 독이다.

보수정당들의 '단일화' 의제를 득표에만 혈안이 된 그저 그런 짓거리로만 치부했는데, 정당정치를 황폐화하는 독이라는 점을 놓치고 있었다. 한국 정치사에 제대로 된 정당 정치가 있었는지 의문이지만, '단일화'는 정당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단일화가 정당 정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려면 합당이 전제되어야 한다. 상호간 정책의 일치를 인정하고 당을 합쳐 새 정당의 후보로 나서면 되는 것이다. 물론 합당이라는 형식적 조건이 그대로 진정성을 확보해주지는 않는다. 92년 김영삼에게 대통령 당선을 가져다 준 '3당 합당'이라는 역사를 떠올려보라. 그건 '합당'이 아니라 추악한 야합이었을 뿐이다.
합당 후에는 인민들의 검증 기간이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 선거 직전에 별의 별 명분을 내세우며 합당을 하고 읍소를 하는 것은 '쇼'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특정 인물이 아닌 정당이 중심이 되는 정치를 위해서 '후보 대 후보'가 아니라 '정당 대 정당'의 관계로 대면해야 한다.
<프레시안>에 좋은 글이 있어 가져왔다. 구구절절 틀린 말이 없다. 특히 마지막에 민주노동당을 꼬집는 말은 정확히 옳다. 그래서 안타깝다.


5대를 이어온 고질병, 단일화

[기자의 눈] 교과서에만 있는 '정당정치'   등록일자 : 2007년 10월 17일
 
범여권의 내부 경선이 끝나기 무섭게 등장한 후보단일화 논의는 졸렬한 우리 정당정치의 단면을 보는 것 같다. 정치권의 장삼이사들이 예측한 수순이긴 하다. 그러나 보란 듯이 정치권을 습격한 단일화 국면이 별다른 비판적 검토 없이 당연시 되는 건 아무래도 문제가 심각하다.
 
단일화는 연원이 깊다. 87년 YS-DJ의 분열이 군사독재 세력에게 정권을 헌납한 패착으로 기록된 후 생긴 집권의 공식은 한마디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였다. 92년 YS가 승리를 거둔 밑바탕은 민자당 3당 합당이었다. 97년 'DJP 공조', 2002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도 DJ와 노 대통령의 청와대행 티켓이 됐다.
 
실패했건 성공했건 지난 20년간 네 번의 대선에서 단일화는 한 번도 쉼 없이 시도됐고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으니 이쯤이면 '대선의 법칙'이라 할 만하다.
 
승자의 기록은 단일화에 대한 미화 작업이었다. 민자당 3당 합당이 없었으면 군정을 종식시킨 문민정부의 탄생은 없었을 것이라는 논리, DJP 공조가 역사적인 정권교체의 디딤돌이었다는 논리, 노무현-정몽준 단일화가 보수세력의 정권탈환 기획을 무너뜨린 원동력이었다는 논리를 귀가 닳도록 들었다.
 
하지만 반복된 단일화의 내막은 무엇이었고 그 뒷일은 어찌 됐었나. 누대를 관통한 단일화의 원리는 정치 보스들의 '묻지마 야합'이거나, 이념과 정책을 무시한 지역연합이거나, 지지세력과 가치지향이 결코 균질하지 않은 집단들의 편의적 합체였다.
 
삐걱대던 DJP 공조는 2001년 한나라당이 제출한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안에 자민련이 동조하면서 끝내 파경으로 끝났다. 실질적인 내막은 내각제 추진을 약속했던 DJ의 묵묵부답에 대한 JP의 보복성 일격이었다.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는 '공동정권'을 출범시켜보지도 못하고 대선 전야에 파국을 맞았다. 이유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간단했다. 정몽준 의원 측이 밝힌 바에 따르면 문제의 그날, 노무현 후보가 "북한과 미국이 싸우면 우리가 말리겠다. 반미면 어떠냐"고 한 발언이 매우 부적절하고 정책공조 정신에 어긋났다는 것이다.

단일화의 시작과 끝만큼 파행적으로 수미일관한 집권공학이 또 있을까?
 
지향과 이념의 공유 없이 집권만을 목적으로 뭉치면 반드시 깨진다는 교훈을 우리 정치는 올해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부족한 시간에 주판알 튕기기에 여념이 없다보니 후보들마저 점잔조차 빼지 못하고 불쑥불쑥 '후보단일화'가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가까스로 경선 문턱을 넘어왔으면 왜 자기세력이 집권을 해야 하는지, 자신의 시대비전과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대국민보고가 순서다. 그런데 너도나도 '단일화'를 열어놓고 검토하겠단다. 수사는 다양하지만 목적은 하나다. '이명박 집권 저지.' 97년에도, 2002년에도 '이회창 집권 저지' 말고 다른 목적은 없었다.
 
게다가 올해의 단일화 논의가 더욱 우려되는 것은 선거용으로 탄생한 세력끼리 쑥덕여 몸집 불리기를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합민주신당의 전신인 열린우리당의 3년은 정당정치에 대한 파괴적 실천이었다. 지지층마저 외면하자 대선을 다섯 달 앞두고 급조한 게 지금의 신당임은 주지의 사실. 2002년 대선 직후 갈라선 후 4년을 원수처럼 으르렁거렸던 민주당과 신당이 대선을 앞두고 다시 뭉쳐보겠다는 속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음 달 출범할 '문국현 신당'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정치적 대표체로서의 정당적 실천과 검증 자체가 전무한 세력이다. 문 후보가 내세우는 솔깃한 대안적 가치는 이 대목에선 여전히 장밋빛 청사진 이상이 되기 어렵다. 이는 그가 늘 주장하는 대로 "유한양행이나 유한킴벌리, 킴벌리클라크 북아시아 회장으로서 전세계의 갈등을 조정한 경험이 있다"는 식의 개인적 이력으로 쉽게 치환돼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문국현 후보는 지금 당장은 '권력 나눠먹기'에 대한 비판을 우려한 듯 그동안 내뱉었던 단일화와 관련한 자신의 발언을 살짝 거둬들였다. 그러나 단박에 논란의 중심에 선 문 후보가 한쪽으론 정동영 후보 등과의 후보단일화 가능성을 열어두는가 하면, 다른 한쪽으론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와 접촉을 모색하며 진보적 이미지까지 얻어내려는 듯한 행보는 현재의 상황을 즐기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평화개혁세력 대연합', '진보개혁연대' 등 포장지가 뭐가 됐건 기계적 단일화는 정당정치의 황폐화로 가는 지름길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대선을 불과 두 달 앞두고 구축된 '단일화 프레임'이 우려스러운 건 그 때문이다.
 
하긴, 정당경력 7년차 관록의 민주노동당마저 '가치연정'이라는 희뿌연 개념을 유포시키며 제 발로 단일화의 자장 안으로 걸어들어 온 마당에야….
 
임경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