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나에게 이런 때도 있었네

검색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나의 글.
<시민의 소리>에 실려 있다.
어린 시절, 이런 때도 있었네 싶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나에게 그런 용기와 열정이 있었나.

캐리어 직원에게 바람맞은 시민기자 
작성자 : 조원종  2001-05-02 00:00:00   조회: 177
 
나는 약속 안 지키는 사람을 굉장히 싫어한다. 오늘(4월30일) 난 바람맞았다. 무슨 일로?

어제였다. 메마른 땅을 촉촉히 적시는 단비가 내리는 29일 오후 4시 25분쯤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누구? 글쎄다. 안타깝지만 그건 나도 모른다.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사람은 내가 다니는 학교와 학과, 이름, 핸드폰 번호까지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캐리어 직원'이라는 것뿐이다. 그는 다짜고짜 내 글에 대해서 혹평을 가했다. 그 때의 기억과 기록해둔 것을 최대한 살려 쓴다.

"조원종씨? 당신이 그 글 올렸지? 아니 기자라는 사람이 글을 그 따위로 쓰면 어떡해? 한쪽의 말만 듣고 글 올리면 되냐고?"
"실례지만 누구시죠?"
"나 캐리어 직원인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이름? 이름이고 ×이고 알 것 없어."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죠?"
"(잠시 당황하더니 더듬거리면서) 인터넷... 전남대 인터넷 들어가면 다 알 수 있어."
"저희 학교 홈페이지 어디서 알아내셨는데요?"

그는 대답을 안하고 계속해서 '글을 그 따위로 쓰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꽤나 험악하게 늘어 놓았다. 회사나 캐리어 노조측의 말도 들어야 된다고 하면서. 나는 27일 캐리어 노조측과 통화한 내용을 기사에 써 놓은 상태여서 그 사실을 알려주고 아직 기사화되지는 않았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기사에서 잘못 쓴 게 있다면 듣고 싶으니 만나자고 했다. 그 사람도 그러자고 했다. 나는 30일 오전에 캐리어로 가서 전화할테니 연락처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내가 전화할거야'라고 말했다. 나는 계속해서 연락처와 이름이라도 가르쳐달라고 했으나 그 사람은 자기가 연락한다고만 하고 끝내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날 저녁 집에 갔더니 놀라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나를 찾는 전화가 왔는데 내가 무슨 기사를 잘못 썼다며 뭐라고 하더라는 거다. 캬! 대단하다. 우리 집 전화번호는 또 어떻게 알아냈을까? 나는 잠시 절망에 빠졌다. 기자를 꿈꾸고 있는 나의 취재능력이 이것밖에 안된다니... 그 사람은 우리집 전화번호까지 다 알아냈는데 나는 그 사람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은 기자를 꿈꾸는 나에겐 큰 수치였다. 이렇게 되고 보니 욕심이 생겼다.

"내일 그 사람 만나면 한수 배워야겠다. 이 놀라운 정보력. 캬!"

드디어 그날은 오고야 말았다. 그의 정체가 밝혀지는 날.. 내심 기대를 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남의 학교, 핸드폰번호, 집전화번호를 다 알아낼 수 있을까.
그런데 12시가 넘도록 그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꼭 만나서 한수 배워야 하는데. 그러나 나에게도 '히든 카드'가 있었으니 내 핸드폰은 발신자 표시가 된다는 거다. 어제 내 핸드폰에 찍힌 그 전화번호를 적어 놓았던 것이다. 캐리어 정문 앞에서 나는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뚜우 뚜우 가고... 드디어 딸까닥 상대방이 수화기를 들었다.

"예. 정문경비실입니다."

허걱! 군대시절 짬 안되는 행정병의 목소리처럼 딱부러지는 목소리.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전화를 받은 캐리어 경비원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몇 번으로 전화했냐고 거듭 물어왔다. 나는 그 전화번호를 몇 번이고 불러줬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참 가관이다.

"아... 그 번호는 옛날 번호인데요. 지금은 그 번호 없어요. 누가 전화선을 어떻게 했나."

아니 분명히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고 자기가 받았으면서 그 번호가 없다니... 내 핸드폰이 미쳤나? 없는 번호로 걸었는데 통화가 되고. 어쨌든 나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꼭 만나고 싶다. 도대체 누구신지. '이름이고 ×이고'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님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