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착한 사마리아인은 못 되더라도


#1 "자원을 절약해야지!"
중학교 2학년 때다. 친구와 동부경찰서 부근 학원가를 걷고 있는데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가 학원 전단지를 우리에게 건넸다. 그 친구는 망설임 없이 받았고, 나는 외면하며 받지 않았다. 친구가 '왜 받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별 생각 없이 귀찮았기 때문이었는데, 왠지 녀석의 진지한 질문에 그럴 듯한 대답을 해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보지도 않고 버릴 건데, 그건 국가적으로 자원낭비잖아."
친구는 실망했다는 듯이 말했다.
"그냥 할머니 도와드리는거지..."
색기... 니 똥 굵다... 졸라 쪽팔렸다. 내색은 안했지만.
20여년이 지났지만,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는 그 이후로 거리에서 나눠주는 전단지를 무조건 받는다. 일당 몇 푼에 할당받은 전단지를 소화해내야 하는 그들의 노동을 덜어주기 위해서. 사람들이 바로 버리는 전단지를 상자에 모아서 다시 배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는, 확 구겨서 배포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쓰레기통에 골인시키기도 한다.

#2 그건 좀 치사하잖아
몇 년전부터 전단지 할머니들은 전대 도서관 열람실 안에까지 들어와 빈 책상 위에 전단지를 빠른 속도로 놓고 나가는 신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학생들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전단지 할머니들 때문에 면학 분위기가 흐트러지니까 할머니들의 출입을 막아야 한다는 것. 다행히(?) 공식적인 움직임으로까지 번지지는 않았다. 여하간 너무 한다고 생각했다. 할머니들이 전단지를 책상 위에 놓고 지나가는 데에는 몇 초도 걸리지 않는데, 게다가 사람이 앉아 있는 곳은 그냥 지나가는데도 그것도 참지 못하다니! 아무리 취업하기 힘들고 열공만이 살길이라고 하더라도 고등교육을 받은 지성인의 태도는 아니다. 사회적 보호가 필요한 약자들에게 도움을 못줄 망정 그들의 작은 생업활동마저 그렇게 차갑게 대해야 하는건지. 좀 치사했다.

#3 "됐습니다!"
고속버스터미널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행색이 남루한 어떤 아저씨가 다가오더니 "저.. 담배 한대만..." 했다. 흔쾌히 담배갑을 꺼내 한 대를 공손히 건네드렸다. 그러고 담배 한 모금을 빨려는 찰나, 아저씨는 "한대만 더..." 그랬다. 조금 기분이 상하려고 했으나 꾹 참고 한대를 더 꺼내 주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내 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저씨의 입에서 "한대만 더..."라는 말이 또 나오자마자 나는 단호히 말했다.
"됐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말 되게 웃기네. 도대체 뭐가 됐다는 것일까. 영어로 치면 "I've had it. Enough's enough!" 정도의 뜻으로 한 말이긴 한데.)
내가 베풀 수 있는 선의는 딱 담배 두 대 정도였던 걸까? 아니다. 문제는 왜 처음부터 3대를 달라고 하지 않았느냐는 거였다. 처음부터 3대면 3대를 달라, 아니면 통째로 달라고 하든지. 주는 사람 민망하게시리 연거푸 '한대만 더...'하는 게 싫었던 거다. 웃기는 이유지만 그 때 심정은 정말 그랬다.

#4 거지가 하루에 10만원 벌면 불우하지 않은걸까?
번화가에서 동냥을 하는 거지들 중에 만만치 않은 '고소득'을 올리는 이들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솔직히 얼마나 신빙성 있는 말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치자. So what?
그들이 '고소득'을 올리고 있으니까 동정할 필요가 없는걸까? 그들이 동냥으로 하루에 얼마의 수입을 얻는지와는 별 상관 없이 그들은 여전히 불행한 처지에 있는 약자이고,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도움이 필요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들이 동냥으로 하루에 10만원을 번다(이게 정말 가능한지 굉장히 의문이긴 하다만) 하더라도 그것이 부당한 불로소득인 것도 아니고, 그 수입으로 그들의 삶이 행복해질 것 같지도 않다. 게다가 동냥은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10만원 벌 수 있다고 해서 당장 동냥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설사 정말로 '고소득' 거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방법도 없고, 알 수 있다 하더라도 그에게 필요한 것은 몇푼으로 대변되는 작은 도움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차피 만원짜리를 선뜻 줄 생각이 없다면, 몇 푼 주고 말 일이다.

#5 외면
몇 달 전, 집에 가는 길에 중학생 쯤 되어 보이는 남자애가 갑자기 내 옆에 붙더니 "저기, 천원만 주시면 안돼요?" 했다. 별로 착하지 않고 배도 몹시 고팠던 나는 "없어요" 하고 바쁜 척 내 갈 길을 가버렸다. 그러고 걸어가면서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가출 청소년이면 돈이 필요할텐데 하는 생각부터 피시방 게임비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 싸움 잘 하는 놈들의 강압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별 생각을 다 했다. 교사가 되려는 자가 저런 청소년에게 매몰차게 대했다는 자괴감이 들자 도저히 그냥 갈 수 없었다. 만원짜리 하나라도 줘야겠다는 생각에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벌써 장소를 옮겼나 하고 그냥 집에 들어갔다. 결국 이날 일은 부끄러운 경험으로 남게 되었다.


불우한 약자를 돕는 데 이것저것 계산하고 짱구를 굴리는 것 자체가 별로 도울 의사가 없다는 뜻은 아닐까. 그저 그럴듯한 핑계가 필요할 뿐.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개 풀 뜯어먹는 소리나 하려는 게 아니다. 자신의 여건 하에서 도울 수 있다면 생각 없이 돕고, 그러고 싶지 않으면 생각 없이 안하면 된다는 거다. 작은 도움을 주었다고 해서 특별히 착한 사람들인 것도 아니고, 그러지 않았다고 해서 손가락질 받을 일도 아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못 되더라도 너무 치사하게 굴지는 말아야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