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그들이 사라졌다

추석 연휴가 끝나고 뭔가 이상했다. 날마다, 몇 년이고 왔다갔다 한 길인데 왜 이렇게 낯설지 했는데.
도로의 한 차선과 인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노점들이 모조리 사라진거다. 염주사거리 광주은행에서부터 소방서 가는 쪽으로 50여미터의 길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이 동시에 증발해버렸다. 연휴가 끝나자마자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늘 화난 듯한 표정이어서 저러면 장사 잘 안될텐데 걱정되던 야채장수 아저씨가 보이지 않는다. 왼쪽 무릎이 좋지 않아서인지 다리를 절뚝거리던 아저씨다. 어쩌면 화난 표정이 아니라 통증 때문에 인상을 찌푸린 것일지도 모르는 아저씨.
이동식 그릴 위에 소시지를 굽던 할머니와 배불뚝이 아저씨도 사라졌다. 이들은 모자지간이었다. 코딱지만 한 텃밭에서 힘겹게 경작했을 야채들을 인도 위에서 다듬어 팔던 허리 구부정한 할머니도 없어졌다. 1천원짜리 샌드위치를 팔던 1톤 트럭은 매일 저녁 개시했는데 이제 보이지 않는다. 근처 학원을 오가던 아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노점상은 1톤 트럭에 과일을 잔뜩 싣고 와서 인도 위에서 팔던 과일장수 아저씨다. 키도 작고 마른 체격인 아저씨는 거의 날마다 똑같은 장소에서 노점을 열었다. 오며가며 본 지가 수년째였다. 아저씨는 매일 아침 장사를 시작해서 밤 12시가 다 되어갈 즈음 철시했다. 독서실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노점을 정리하는 모습을 종종 보곤 하였다. 아저씨는 항상 자신이 장사했던 주변의 인도를 빗자루로 쓸며 청소했다. 그 모습이 꽤나 마음을 뭉클하게 하였다. 아저씨의 공중도덕에 감탄했다거나 이타적 행동에 감동해서가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수년 동안 같은 장소에서 같은 물건을 팔아온 아저씨에게 그 인도는 자기만의 매장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번듯한 건물 안에 마련한 가게는 아니지만, 수년간 생계를 의지해온 공간이니 아저씨에게는 자기만의 가게였을지도 모른다. 날마다 가게 문 닫기 전에 내일 장사를 위해 깨끗하게 정돈하고 청소하는 가게 주인의 성실한 마음을, 나는 인도를 청소하는 아저씨에게서 보았다. 비록 간판 하나 내걸 수 없고, '불법노점'이라는 행정의 타박에 마음 고생 하더라도, 아저씨에게는 엄연한 일터이고 매장이며, 생계의 터전이었다.

그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지 나흘이 지났다. 아마도 행정기관의 철거협박이 있었겠지.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라면, 기계적 법치보다 누군가의 생계를 더 소중하게 더 우선하여 보호해야 하는 거 아닐까. 돼지보다 사람이 더 많이 살고 있는 사회라면, 함부로 남의 생계를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닐까.
거의 모든 도로에서 자행되는 불법주정차 단속에는 반짝 보여주기 식으로 때우던 행정기관이 약자의 생계에는 이토록 단호해도 되는 것일까. 오히려 약자이기 때문에 '불법'의 불가피함을 고려하는 행정을 바라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인가.

내내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행정이 나선 것을 보면, 주민들의 민원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동네 사람들 꽤 오랫동안 노점과 공존하며 잘 지내온 것 같았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주민들은 지금까지 노점들이 차지하고 있던 도로의 한 차선과 인도의 절반을 되찾게 되었다. 이제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동차를 몰게 되었고, 좀더 넓은 인도를 이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졌을까? 그렇다면 에라이~

어진간한 도로의 가장자리 차선은 불법주정차 때문에 도로 구실을 상실했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다. 어차피 도로 구실도 못하는데 합법적 노점공간을 내주면 안되겠냐. 아무 것도 생산하지도 않으면 땅만 차지하는 불법주차보다는 경제활동을 하는 노점들에게 할애하는 것이 명분도 있고 보기도 좋고 경제적이지도 않겠냐.
쾌적하게 보행할 권리와 도로를 원활하게 이용할 권리는 보편적인 시민의 권리이다.라는 것이 원칙이긴 하다. 하지만 보편적 권리를 보장하려다가 누군가의 생계가 힘들어질 수도 있는데도, 굳이 원칙은 지켜져야 하는 걸까. 우리의 보편적 권리가 침해받더라도, 약자를 위해 약간의 불편함 정도는 용인하는 관대함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기가 막히고, 웃기는 사실은 노점으로부터 되찾은 도로의 가장자리 차선을 고스란히 불법주차된 자동차들이 독차지 하고 있다는 거다. 아, 웃겨. 10대도 안되는 자동차 주차공간 마련하려고 그들을 몰아낸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