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래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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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희망


한국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 변천사를 정리해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물론 초등학생 때 꿈꿨던 장래희망대로 어른이 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하지만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을 통해 당대의 사회상을 읽는 게 뜬금없는 일은 아닐 것 같다. 내 생각엔 왠지 제법 정확하게 사회상을 반영하지 않을까 싶다만. 아이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를 정확하게 따라 배우는 법이니까.

이런 추정을 한번 해보는데,
음... 60-70년대에는 군인이라는 직업이 장래희망인 아이들이 꽤 있었을 것 같다. 90년대 들어 오늘에 이르면 그 수는 가파르게 줄었을 것 같고.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80년대에도 장래희망이 '장군'인 놈들이 꼭 있었다.
요즘 초등학생들 중에 군인이 장래희망인 아이들이 있을까 싶다. 군인 가족이라면 모르겠다만.
과학자는 또 어떨까? 나도 장래희망 칸에 과학자라고 적은 적이 몇 번 있다. 물리학인지, 생물학인지, 화학인지 이딴 건 전혀 모르고. 로보트 만드는 사람이 과학자인줄만 알았으니까. 로보트를 만들어서 지구를 지키는 건 꽤나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었다. 그 땐 과학자가 장래희망인 놈들이 상당히 많았다.
중산층 이상이고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은 대개 변호사, 판사나 의사가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근데 똑같이 사시 패스한 법조인인데 검사가 장래희망이라고 한 친구는 전혀 기억에 없다. 그 때도 검사 이미지가 개떡 같았나?)

초등학생 때 장래희망이란 게 실현가능성과는 전혀 무관하고, 순전히 '되고 싶다'(그것도 지 혼자 생각)는 꿈일 것이다. 자식에 대한 집착이 강한 부모들은 장래희망 마저 주입시키기도 하지만. 어쨌든 각자 다른 장래희망을 가졌지만, 그 이유는 비슷했던 것 같다. 뭔가 이바지해야 한다는. 그 시절엔 우리가 이바지할 대상이 '조국'과 '민족' 같은 국가주의틱 한 것들이거나, 기껏해야 '지역 공동체'나 '이웃' 같은 새마을운동틱 한 것들이긴 했다. 그렇게 교육받고 살았으니까.

의사가 장래희망인 아이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치료하는 훌륭한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고, 과학자가 되겠다는 아이는 사람들을 좀더 편안히 살 수 있게 만들고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겠다는 포부도 가졌다. 판사가 되겠다는 아이는 억울한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다.
그게 다 진심인지, 어른이 시키니까 뭔 의미인지도 모르고 한 말인지는 알 수 없다만. 여하간 공개적으로는 다들 뭔가 '이바지'하겠다는 게 장래희망의 포부였다. 물론 이게 무조건 좋은 일은 아니다. '이 한몸 바쳐'라는 정신이 사회구성원이 가져야 할 덕목이 되어버린다면, 글쎄다. 그게 좋은 세상일 것 같지는 않다.

1997년 말 IMF의 금융지배가 시작되면서 신자유주의는 본격적으로 한국의 사회 시스템과 함께 우리의 머리 속까지 바꿔버렸다. 이 때부터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우리에게 세상에 믿을 놈 없다는 불안을 심어주었다. 불안은 바이러스처럼 사회 구석구석에 빠짐없이 빠르게 침투했다. 타인은 연대의 상대가 아니라 경쟁의 상대가 되었고, '너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자본의 신념은 '실용'과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보편적 가치관이 되었다. '타인을 위해서'라는 말은 이제 거추장스러워졌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화폐적 관계로 치환된 세상을 아이들의 장래희망은 그대로 반영한다. 장래희망을 묻자 사채업자가 되겠다고 하는 아이. 당황한 어른이 그건 좋은 게 아니라고 하자 주변의 아이들까지 나서서 '돈이면 다 된다'면서 '현실을 모른다'고 비아냥거리는 세상.

어른을 미소짓게 만드는 아이들의 장래희망을 더이상 들을 수 없게 된다면.... 이보다 더 한 공포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