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조원종을 말하다

1. 소심한 너무나 소심한 소년

어린 시절 친구와 그럴싸한(?) 주먹다짐을 해본 적이 없다. 두들겨 맞을 바에는 양보와 관용의 미덕을 보일 줄 아는 현명한 처사였다.
겁이 많아서 도둑질도 화끈하게 해내지 못했다.
어느날 담배심부름을 갔다가, 주인 아저씨가 없는 사이 초콜렛을 집어 주머니 속에 쏙 넣었다. 3초도 안되는 짧은 동안이었지만, 내 심장은 수십번 쿵쾅거린 것 같았다.
그러나 처음이자 마지막 '장물'인 초콜렛이 주머니 속에서 녹아버릴 때까지 먹을 엄두를 못냈다.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숨도 제대로 못 쉰 소심한 소년의 첫 절도행각은 그렇게 끝이 났다.

한 소녀가 나를 몰래 좋아했다는 것을 빼면 별로 할말 없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입학.
팔뚝의 굵기에 따라 서열이 만들어지는 해괴한 곳이다. 가난하고, 그래서(?) 성적도 별로였던 친구들을 괴롭히는(순전히 재미로!) 팔뚝만 굵은 놈들이 있었다. 그들을 '공공의 적'으로 규정한 소년은 분노의 눈빛으로 쏘아보고 주먹을 쥐었다.

물론 나의 정의감은 놈들의 등 뒤에서만 불탔다. 불의에 대한 응징은 시험 볼 때 옆줄에 앉은 녀석이 답안지를 못 보게 요령껏 가리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나의 심장은 충분히 벌렁거렸다.

어린 시절 시시때때로 강력한 심장 박동을 겪으면서 소년의 심장은 단련됐다.

안타깝게도 나는 '공공의 적'을 척결하지 못하고 고딩이 됐다.

첫학기가 시작되자 학교 밴드부실을 찾아갔다. 영화 주인공처럼 멋지게 트럼펫을 불고 싶었지만, 덩치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선배는 클라리넷을 건네줬다.

그 선배의 키는 나보다 2cm 컸다. ㅡ,.ㅡ

그러나 밴드부원 중에 대학 들어간 학생이 없다는 담임선생님의 말에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엄마가 손목시계 사줄테니까 밴드부 그만둬라.”

인류는 천재 클라리넷 소년을 싸구려 손목시계와 맞바꿔야 하는 어이없는 일을 겪고 말았다.


2. B급 ‘운동권’

S.K.Y를 꿈꿨으나 막판 실전에서 일을 망쳤다.
결국 등록금이 싼 지방국립대를 선택해야 했다. 합격은 따놓은 당상. 1순위로 전남대 신문방송학과에 원서를 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본고사와 면접을 치렀다. 합격자 발표날 친구와 함께 전남대를 찾았는데, 교내 방송에서 신방과 합격자 명단을 발표할 참이었다.

"조.원.종"

가장 먼저 호명된 이름이었다.

"앗! 수석합격이란 말인가!"

그러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듯이 발표도 성적순이 아니었다.
수험번호 순이었다. ^^;;

봄바람 살랑거리는 오후에는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이불 삼아 잠자는 것이 청년학생의 사명이고, 밤이면 벗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이 2만 학우의 생활신조라고 믿었다. 간결한 화두를 던지며 목소리를 높이고 그것과 어울리는 생활을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생활이 화두를 압도하는 사람을 본 적은 드물다.

대학에서 처음 맞는 여름방학.

한 동기놈의 꼬드김에 넘어가 닭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산처럼 쌓여 있는, 핏물 뚝뚝 떨어지는 닭똥집을 삽으로 푸면서, 목 잘리고 쇠갈퀴에 내장을 다 뜯긴 닭 시신의 참혹함에 조금씩 무감각해졌다.
당시 같이 일했던 동기들 사이에서 가장 심한 욕은 '이 오리 같은 놈'이었다. 그나마 죽은 닭들은 작아서 만질만 했지만 오리는 덩치도 크고 비린내도 심해서 '오리 작업'은 모두가 기피했던 일이었다.

여하튼 1명을 빼고 우리는 1주일을 버티지 못했다.

더위가 가시지 않은 어느 여름 밤.

생맥주로 더위를 달래다가 친구와 함께 돌연 여행을 떠났다. 가방에 옷가지와 카메라만 대충 챙기고 부산으로 가는 마지막 열차에 몸을 싣고 무작정 떠났다. 부산역에서 노숙을 하다 쫓겨나고, 부산대 신문방송학과에 찾아가 신세를 지면서 여행의 설레임은 시나브로 피곤과 짜증으로 화학변화를 일으켰다.

비 오는 광안리 해변 망루에 올라 쓸쓸히 불러본 하모니카 소리(연주곡은 '한국사람'이었다)에 날 찾아 준 사람은 술 취한 아저씨뿐이었다.

내 하모니카 소리에 감동했다는 그 아저씨는 자기 집으로 가서 소주 한잔 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나는 '모르는 사람이 같이 가자고 하면 절대 따라가면 안된다'는 어릴 적 부모님의 가르침에 따르고 말았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돈도 없고 오라는 곳도 없던 나는 부모님의 가르침이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4일간의 부산여행은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가르쳐줬다.

술 사주는 선배들을 따라 눈물콧물 다 쥐어 짜내는 최루탄 연기 속을 뛰어다니고, 좀더 모난 짱돌을 찾아 다녔다.

내 머리로 철학하지 않고 문건 몇 장으로 정치적 무장을 했다. ‘철학의 빈곤’은 행동의 과잉으로 표현되었다. 빈곤한 철학을 감추기 위해 온갖 집회와 상경투쟁에 참석하고 돌과 직격최루탄이 난무하는 싸움터에 나갔다. 공식적으로 ‘모범적인 운동가’였다. 그러나 나의 행동은 분위기상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일 뿐 운동이라고 부를 자신은 없다.

1996년 청와대의 낙하산 인사에 항의하며 파업을 벌인 문화방송 노조에 연대하기 위해 학내에서 서명운동을 벌였다. 직접 서명용지를 만들고 성명서를 써서 학내언론3사에 공동성명 발표와 서명운동을 제안한 것.

지금이야 언론개혁이 히트상품이 되었지만 그 때는 별 관심을 못 받던 시절이다. 나의 선각자적 자질이 엿보이는 순간이다. 드디어 1천명이 넘는 서명을 받았는데 파업이 끝나버렸다. 함께 고생한 동료들과 소주로 허탈함을 달랠 수밖에.


3. 그래도 군대는 싫다

학사경고 2회라는 방탕의 대가를 치르고 입대했다. 집행유예 기간을 안전하게(?) 넘겨야 한다는 부모님의 강력한 명령 또한 외면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의 하늘은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인 줄로만 알았던 우리의 이등병은 축구를 할 때마다 살벌한 욕을 들어야 했다. 마음의 간절한 부탁을 단호히 거절한 육신 때문이다. 야간 대학에 다니는 소대장의 레포트를 대신 써주고 작업 몇 번 열외 한 것, 웅변대회 나가는 고참에게 원고를 써주고 청소 몇 번 열외한 것, 중대장 대신 글 몇 번 써주고 포상휴가 간 것 등을 빼면 나름대로 정직하게 복무했다.

분대장이 되었을 때 우리 분대는 알아주는 오합지졸이었다. 전입 온 신병들 중에 위험하다싶은(?) 놈들은 모두 우리 분대로 왔다. 중대장과 소대장이 나의 통솔능력을 믿었다기보다는 사고예방 차원이었음이 틀림없다.

축구면 축구, 작업이면 작업, 훈련이면 훈련 무엇 하나 남보다 앞설 줄 모르는 겸손지덕의 병사들. 낮이든 밤이든 초소만 나가면 졸기 시작하는 못 말리는 녀석, 청소하다가 고참이 욕했다고 소각장에 꼭꼭 숨어버리는 녀석 등등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녀석들과 함께 결코 평범하지 못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전역하던 날 아침, 눈물을 흘린 후임병까지 둔 걸 보면 그리 악독한 고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4. 철없는 복학생

제대 후 선배의 권유로 야학을 하게 되었는데 재기발랄한 언변과 성실한 수업으로 야학 학생인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중매설이 돌 정도의 인기를 얻었다. 지금 와서 고백하건대 한 아주머니 학생으로부터 촌지(?)를 받은 적도 있다.

고생한다며 차비에나 보태라고 2만원을 찔러 주시는데 두어 번 사양하다 억지로 주머니에 넣어 주시는 걸 못 이기는 척 하고 받았다. 촌지의 맛은 참 짜릿했다.

1999년 12월 말, 학과 선후배들과 함께 인터넷방송을 해보겠다고 덤볐다. 이런 경우를 두고 ‘맨 땅에 헤딩한다’고 한다. 새내기들을 대상으로 워크샵도 열고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다 결국 회의주의(?)에 빠지기도 하면서” 드디어 2000년 6월 7일 지역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개국식을 했다.

나는 인터넷방송 콘텐츠 중 하나인 웹진의 편집장을 맡았는데 일본대중문화 개방에 대해서도 다루고, 광주역 등 지역의 대표적 공간에 대한 문화비평도 시도하는 등 나름대로 종횡무진 필봉을 날렸다.

또 2000년 4월에는 인터넷한겨레 사이버기자단 <하니리포터> 1기로 뽑혔다. <하니리포터> 광고카피 공모에 응모, 대상을 수상해서 인터넷한겨레 오귀환 사장으로부터 직접 도서상품권을 받기도 했다. 한때 CF감독이 꿈이었는데 전혀 근거가 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

<하니리포터> 5·18 공동취재단과 함께 5.18기념행사를 취재보도하고 인터뷰 기사도 썼다. 캐리어사내하청노조 파업, 민주노총 집회, 추사모(추미애의원) 사이트 개설, 5·18 기념행사, 일본대중문화개방 등 30여 건의 기사가 <하니리포터>에 실렸다.

한편 광주에서 시민저널리즘 실현을 내세우고 창간된 <시민의소리>의 시민기자로서 1면에 캐리어사내하청노조 파업 기사가 실리는 개가를 올렸다. 캐리어사내하청노조의 비정규직 철폐 투쟁 관련 기사를 <시민의소리>와 <하니리포터>에 지속적으로 보도하여 캐리어 사측의 협박성 전화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후 <시민의소리>가 주최한 1기시민기자학교를 수강하고 실제 지면에 기사를 올렸다.

2000년 9월 오마이뉴스와 하니리포터에서 활동하는 학우들과 함께 의기투합했다. 언론개혁의 바람을 학내에 일으켜보자는 목적으로 이른바 전국 최초의 언론개혁대학생모임을 만든 것.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는 옛말에서 착안해 ‘주둥이’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이 모임에서 나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재치있는 언변으로, 족벌언론의 가면을 벗기는 전시회 ‘언론스트립쑈’, 신문의날 기념 ‘신문권력 제사상’행사, 5·18관련 조선일보 전시회 등 자체 기획행사를 했고 신문개혁국민행동광주전남본부에서 비상근 활동을 하기도 했다.


5. 당원이 되다

나는 민주노동당 당원이다.
고백하건대 난 ‘정치 철새’스런(?) 행적을 보인 적이 있다. 사회당 지지자에서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옷을 갈아 입은 것이다. 내가 다시 사회당으로 간다면 그 때에는 나를 ‘정치철새’라고 불러도 좋다.
미디어에서 관심을 갖는 인물들에게는 대개 특정한 계기라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만약 어떤 미디어에서 나를 인터뷰한다면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 “민주노동당 당원이 되기로 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 그런 건 없다. 사실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그 ‘계기’라는 것을 발견할 수가 없다. 매사에 직관적으로 판단하고, 이성적 사고에 감성적 잣대가 개입하고야 마는 나 같은 인간형을 움직이는 것은 드라마틱한 계기보다는 자기 이익이다.

나는 민주노동당에 입당하는 것이 나에게 이롭다고 생각했다. 난 이 세상이 매우 불편하고 마음에 안 든다. 국가라면 최소한 인민들이 주택과 의료 문제에 있어서 별 걱정없이 살 수 있도록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영 아니다. 또 남성인 내가 보기에도 여성들이 속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이 안된다. 농민들의 삶은 또 어떤가? 농민들의 삶과 내 이익이 무슨 관계가 있냐고? 농민들의 삶이 무너진다는 건 바로 내 먹거리가 무너지는 것이다. 그리고 먼 훗날 목수 겸 농민이 되고 싶은 내 꿈(과연 실현될까?)을 위해서도 농민들은 아주 잘 살아야 한다.

여하튼 내 삶의 구석구석에서 느껴지는 이 사회의 천박한 수준이 난 싫다. 민주노동당은 바닥을 기고 있는 이 사회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거다. 그래서 나는 ‘청년좌파’(옛 청년진보당(현 사회당) 기관지) 구독자에서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동시에 참여의 강도도 높였다. (사회당아! 미안하다. 하지만 난 네 그 강렬한 정치를 신뢰한다. 다만 내 근성이 물러터진 탓에 널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최근엔 당비도 2만원으로 인상했다. 그런데 역시 민주노동당은 평등의 가치에 충실하다. 당비 1만원 낼 때에나 2만원 낼 때에나 나에 대한 대우는 똑같다. 난 민주노동당원이라는 게 자랑스럽다. 왜? 폼 나잖아!


5. '성대한 만찬'이 될 수 있을까?

화두는 간결하지만 생활은 어려운 법이다. 누구나 견고한 삶(혹은 그렇게 보이기를)을 바라지만 삶의 허약한 토대는 생활의 껍질 위에 실체를 드러내고 만다. 간결한 화두를 붙잡고 복잡한 생활에 용감무쌍하게 부딪치면서 살겠다는 각오를 한다.

귄터 그라스는 자신의 소설 「넙치」를 두고 말했다. “나의 소설은 가벼운 요깃거리가 아니다. 이 시대에는 한번 쭉 훑어보면 그만인, 영양가 없는 패스트푸드 같은 책들이 너무나 많다. 나는 「넙치」가 독자들이 천천히 음미할 수 있는 성대한 만찬이 되기를 바란다.”

결국 나는 성대한 만찬이 될 수 있을까?

작성일자 : 2004년 3월 12일

1995.11 ~ 1996.08 / 전남대 신문방송학과학생회 연대사업부장
1999.07 ~ 1999.11 / 과내 사회과학 학습소모임 <이슈> 활동
1999.10 ~ 2000.10 / 전남대 신문방송학과 예비역협의회장
1999.12 ~ 2000.11 / 전남대 신문방송학과 자료실장
1999.12 ~ 2000.07 / 대학생인터넷방송국 <캐스트러시>웹진 편집장
2000.01 ~ 2002.07 / 광주밀알희망중학교 국사 교사
2000.04 ~ 2001.12 / 인터넷한겨레 <하니리포터>
2000.10 ~ 2001.08 / 언론개혁대학생모임 <주둥이> 활동
2001.02 ~ 2002.02 / 전남대 신문방송사 T.A.
2002.02 ~ 2002.10 / 대학졸업 후 <한겨레> 공채 준비. 낙방
2002.11 ~ 2002.12 / 광주광역시 하남 중앙초등학교 영어보조교사
2003.02 ~ 2003.09 / <대학문화신문> 대학보도 담당 기자
2003.10 ~ 2004.08 / 광주광역시의회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윤난실 의원 의정지원 활동(속칭 보좌관)
2004.09               / '원종이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 고민하다가.
2004.12               / 전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일반사회교육 전공 입학전형에 응시, 살인적인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합격. 내 인생 3개의 프로젝트 중 2번째 프로젝트를 앞당겨 추진하게 됨.

2005.01 ~ 2005.07 / 5·18 및 12·12사건 수사, 재판기록 분석팀 참여
2005.03 ~ 현재     / 전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일반사회교육 전공 입학, 재학중
2005.04 ~ 2006.02 / 휴먼스쿨 논술 고등반 주말 강의
2005.04 ~ 2005.07 / (사)전라도지오그래픽, ‘남도문화·인문지리’ 웹 콘텐츠 아카이브 구축 용역(광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 발주) 참여
2005.05 ~ 현재     / 민주노동당 사진동호회 <찍누리> 운영위원
2005.08 ~ 2005.11 / 2005 광주인권영화제 웹사이트 제작 관리 및 언론홍보 담당
2006.01 ~ 2006.02 / 박준영 전라남도지사 저서 <전라도 사랑> 출판 관련 사진작업 참여
2006.04 ~ 2006.05 / 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광주광역시의원 민주노동당 후보 윤난실 선거사무원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