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카드 한장
diary

현금카드 한장

방에서 안경을 벅벅 닦고 있었다. 아빠가 부른다. 귀찮다는 듯 안경을 닦으면서 '왜요?'하고 갔다. 아빠는 현금카드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그걸 보자마자 '아따 됬당게요' 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얼마 전에도 한번 그랬던 적이 있다. 엄마가 없을 때 아빠는 나에게 현금카드를 내밀었다.

-돈 필요할 때 꺼내 써라. 비밀번호는 알지잉? 아빠 차 번호.
-돈 필요 없는디.
-그래도 먹고 싶은 거 있으믄 사 먹어야제. 교통비도 하고.
-아따 내가 돈 쓸 일이 뭐가 있당가. 필요 없어라우.
-아따 그래도 그게 그것이 아니제. 안 써도 됭게 그냥 갖고 있어라.
-됐어라.

그렇게 나는 퉁명스럽게 거절하고 아빠를 피해버렸던 적이 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엄마가 없을 때 아빠는 다시 현금카드를 내밀고 있다.

-아따...
-아니 그것이 아니고.. 그냥 필요할 때 편하게 써야. 돈이 필요할 때가 있제 왜 없냐. 엄마한테는 말할 필요 없고. 그냥 교통비도 하고 빼서 써라잉.
-(안경알이 뭉개져라 벅벅 닦으며) ........
-비밀번호는 알지잉?
-(이러다 안경알 얇아지겠네. 안경알 벅벅 닦으며) 네...

더이상 피하지 못하고 나는 아빠의 (엄마는 모를) 현금카드를 받았다. 나는 지금까지 아빠가 스스로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옷 한벌 양말 한짝도 쉽게 산 적이 없다. 엄마가 눈치껏 '당신 바지라도 하나 사야제?' 해야 비로소 '비싼 건 필요 없고, 최대로 싼 걸로 하나 살까?' 하는 게 아빠다. 내가 아는, 아빠의 유일한 사치는 호두과자다.

아빠는 7형제 중 장남이다. 할아버지는 아빠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아빠는 운전을 배웠고, 그 기술로 동생 여섯을 키우고 학교 보냈다. 아빠는 운전을 하고, 돈을 가져온다. 그 돈으로 우리 식구는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잠 잘 집을 가졌다. 식구를 위해 돈을 벌어오는 게 절대적이고 유일한 삶의 가치이고 기쁨인 양 살아온 사람이다.

아빠는 장관 표창을 받은 사람이다. ㅋ


아빠가 없을 때 엄마한테 아빠 흉(?)을 보면 엄마가 늘 하는 말이 있다.
-그래도 니그 아빠 만큼만 살아라. 세상에 저런 아빠가 어디 있다냐.

내가 감옥에 있을 때 1심에서 실형 선고를 받은 날, 아빠는 광주로 내려가던 중 갓길에 차를 세우고 운전대를 잡고 펑펑 울었다는 말을 엄마한테 들은 적이 있다. 엄마는 아빠가 우는 걸 처음 봤다고 했다.

아빠가 준 현금카드 한장. 아빠가 준 것은 현금이 아니라 코끝이 찡해지는 父情이다.

그건 그거고. 돈은 또 돈이다. 오는 기회 발로 찰 이유도 없고.
아빠의 현금카드를 들고 현금인출기 앞에 섰다. 기계가 드륵드륵 현금카드의 마그네틱을 읽는다. 기계 따위는 아빠의 父情을 읽지 못한다라는 뻘 생각 잠깐.
화면에 심상치 않은 메시지가 뜬다.

'장기미사용으로 사용불능'

헉. 뭐여 이거.

아빠, 나한테 왜 그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