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 :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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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 :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하여

나는 배우보다는 감독을 보고 영화를 선택하는 편이다. 어떤 감독들의 영화는 개봉을 기다리고, 꼭 챙겨서 본다. 그런 감독들 중 한명이 이준익 감독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감독 중에서 어쩌면 가장 대중적이고 가장 쉬운(?) 영화를 만드는 것 같다. 감히 내맘대로 인간성을 평가한다면, 이준익 감독은 정말 인간적인 사람일 것 같다. 내가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까닭은 영화의 밑바닥에서 조차 잃지 않는 휴머니티일지도 모른다. <왕의 남자>나 <사도>보다는 <라디오스타>나 <즐거운 인생> 뭐 이런 영화가 인간 이준익과 가장 가까운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겁나게 웃기다가 울컥하게 만들고, 급기야 눈물을 흘리게 하고 결국엔 '그래,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라는 생각에 안도하게 만든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는 거, 이준익 감독 영화의 휴머니티는 무겁지 않게 우리를 위로한다.

<변산>에서 이준익 감독이 선택한 음악은 힙합이다. 부모 세대보다 더 가난하고 불행해질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 시대를 버티고 있는 청춘들을 위한 영화다. 그리고 인생에 대한 영화다. 젊음과 늙음, 죽음까지 <변산>은 보여준다.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수배중인 건달 아빠를 잡으러 온 형사들과 시비가 붙은 학수는 '내가 뭘 잘못했는데!'라고 울부짖는다. 살다보면 누구나 그럴 때가 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삶이 고통스러운 일은 흔하다. 선택권도 없이 고스란히 온몸으로 떠안아야 할 인생의 문제들.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애써 모른 척 하거나 도망치거나. 용기를 내어 정면으로 맞닥뜨린다고 한들 순순히 해결되거나 상처 없이 지나가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인생에서 피할 수 없다면, 젊은 시절에 겪는 것이 낫다. 겪을수록 헤쳐나갈수록 맷집은 단단해지고 약간은 도움이 될지도 모를 지혜도 생기는 법이니까.

가족을 돌보기는커녕 평생을 깡패짓과 도박에 탕진하고 바람까지 피운 아버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아버지가 남겨질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용기를 가지라는 것.

감정이 고조된 학수는 아버지에게 '씨발'이라고 욕하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얼굴을 들이민다. '때려, 때려봐라'. 학수는 아버지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관객들은 '헉'. 얼핏 패륜으로 보이는 장면이지만, 나는 죽어가는 아버지가 평생 책임 한번 지지 못한 아들에게 마지막 책임감을 보여준 장면으로 보았다. 아버지 본인도 잘 알 것이다. 평생 동안 자신이 가족에게 무슨 짓을 하고 살았는지. '미안하다'는 말한마디로 해피엔딩이 될 수 없다는 사실, 아들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도 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들의 주먹 앞에 기꺼이 얼굴을 들이민 것은 죽음을 앞둔 아버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책임감과 사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제발 자신으로 인해 지옥같았던 과거와 선을 긋고 당당히 너의 인생을 살아라. 아버지는 학수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아버지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는 짓은 도저히 할 수 없는 그런 장면이었다면, 평범한 갈등 상황으로 끝났을 것이다.

학수는 아버지의 얼굴에 주먹을 날림으로써, 아버지는 아들의 주먹을 기꺼이 맞아줌으로써 그들 방식대로 화해를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이 용서의 완성이 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학수는 용기를 얻지 않았을까. 지긋지긋한 과거로부터 조금은 벗어나게 해줄 어떤 용기.

사실 과거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매듭이 필요하다. 어떠한 상황이 지나갔다 하더라도 매듭이 없으면 그 상황은 현재에도 미래에도 반복되며 나타난다. 매듭은 잘 고안되고 계획된 것일 필요는 없다. 살다보면 해결되는 일보다는 그렇지 않는 일이 훨씬 많다. 우리는 해결되지 않는 일의 해결책을 찾는 것보다 해결되지 않아 우리가 겪는 괴로움에 대하여 더 많은 대화를 해야 한다.

<변산>은 전작 <동주>와 <박열>에 이은 '청춘 3부작'이라고 홍보된다. 홍보를 위한 끼워맞추기라고 생각하지만 뭐 홍보는 그러한 것이니까. 그래도 주요 인물이 '청춘'이라고 해서 그대로 청춘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변산>은 청춘들이 대거(!) 등장하고, '랩'이 효과적인 전달 수단으로 쓰이지만, 청춘들에게만 머물지는 않는다. 학수 아버지의 위악에서 우리는 자식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애정을 본다. 아버지를 원망하고 '씨발'이라고 욕하며 주먹질까지 저질러버린 학수도 죽어가는 아버지 앞에서는 자식의 슬픔을 어찌할 수 없다.

인생의 대부분은 이 '어찌할 수 없음'을 한탄하고 '내가 뭘 잘못했는데!'라고 울부짖으며, '씨발' 한번 내뱉고 허공에라도 주먹질 하면서 살아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준익 감독의 재능은 바로 여기에 있다. 락이든 랩이든, 구질구질한 청춘이든, 한물간 청춘스타이든, 철없는 아재들이든 이준익 감독의 영화에서는 그저 인생을 보여줄 뿐, 어떤 세대에 머물지 않는다.

이준익 감독이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새 영화를 기다릴 것이고, 지난 영화도 다시 찾아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