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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도 차별하는 사회

소위 버지니아텍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이 '한국계'로 알려진 이후 묘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정부는 긴급히 대책회의를 연다. 정부 차원의 조문단 파견까지 검토되었지만 미국 정부가 'NO' 했단다. 주미 한국대사라는 분께서는 '미국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자성하는 의미'에서 '32일간 금식'을 제안하는 해프닝까지 제공해주신다. 왜 우리가 '자성'해야할까?
혹시 있을지 모를 미국 거주 한국인들에 대한 피해에 대비하는 것은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의 범인이 한국계라는 이유만으로 한국 전체가 책임감이나 죄책감을 느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정부가 나서서 책임감을 느낀다는 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넌센스다. 존재하지 않는 책임을 존재한다고 자백하는 꼴이지 않은가!

일부 민간 영역도 개인의 문제를 집단화하려는 쓸데없는 의식에 휩싸여 있는 듯 하다. 피의자 조승희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미국에서 자랐고 미국 영주권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그를 '한국인'으로 단정짓는다. 핏줄이 같다고 다 같은 한국인일까? 핏줄이 유일한 기준일 수는 없다.
게다가 만약 미국이 아닌 힘 없는 다른 나라에서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어도 한국사회는 이렇듯 호들갑을 떨었을까? 의문이다.

물론 참담한 사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 윤리이다. 이것은 국적과 인종, 나이, 성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 우리의 '추모'는 매우 선택적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추모에서조차 차별적이다.
이번 사건 이후 한국사회의 모습에서 내가 느낀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가 소리 없이 살해되고 있는 이들에 대하여 한국사회는 추모했던가! 3세계의 가난한 아이들이 노동착취, 성착취에 고통받고, 병에 걸려, 때로는 굶주림을 못 이겨 생명을 잃어갔을 때 우리는 그들을 추모했던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인민들이 미군의 무차별 사격과 가공할 폭격으로 몸이 찢겨졌을 때 우리는 촛불을 들었던가!

예를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한미FTA 반대를 외치며 스스로 몸을 불사른 택시노동자 허세욱의 고통을 한국사회는 함께 나누려고 했던가! 한국사회는 버지니아텍의 무고한 희생자들을 추모하듯이 노동자 허세욱의 죽음에는 슬픔을 느끼고 애도를 표하지 않았다. 외국의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메시지를 2번이나 발표했던 대한민국 정부는 자기들이 저지른 짓을 반대한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한 개인의 우발적이고 직접적인 폭력에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구조적이고 간접적인 폭력의 희생자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이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