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닥쳐'가 전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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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닥쳐'가 전부인가?


어제 국제면 뉴스를 훑다가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관한 기사를 봤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칠레에서 스페인어 및 포르투갈어권의 유럽과 중남미 지도자 모임인 이베로-아메리카 정상회담 폐막식이 열렸는데,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이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에게 '입 좀 닥치라'고 소리쳤다는 것이다. 이 날 차베스 대통령은 스페인 전 총리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를 파시스트이자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판하고, '파시스트들이나 인종차별주의자들은 뱀보다도 못한 인간들'이라고 말했다. 이에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 스페인 총리가 연설을 통해 '아스나르는 합법적으로 선출된 지도자'이고 '차베스 대통령은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그는 차베스 대통령에게 '아스나르 전 총리의 비난에도 원칙이 있다'며 체통을 지키라고 말했다.
사파테로 총리의 발언 중간중간에 차베스 대통령이 반박하려고 하자, 스페인 국왕이 '입 좀 닥치라'고 했다. 그리고 다니엘 오르테가 니카라과 대통령, 카를로스 라헤 쿠바 국가평의회 부의장이 중남미의 스페인 기업들을 비판하자 스페인 국왕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기도 했다.


위의 요약은 보도된 팩트만으로 구성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애쓴 것이다.
이 사건(?)은 대부분 신문들이 국제면 기사로 다뤘다. 기사의 초점은 차베스 대통령이 '독설'을 퍼붓자 스페인 국왕이 '입 닥치라'고 했다는 사실에 맞춰져 있다. 국가의 정상급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기에, 기사 가치는 충분하다고 인정된다.
문제는 국왕의 '입 닥쳐'라는 '분노 폭발'에만 주목하고 흥미 위주로 보도하는 자세에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기사의 제목과 리드 문장들만 봐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스페인王, 차베스에 "입 닥쳐" -매일경제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이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입 닥쳐!"라고 고함을 질렀다.

스페인王, 차베스에 "입 닥쳐" -세계일보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스페인 국왕과 총리에게 혼쭐이 났다.
 
스페인 국왕 "차베스, 입 닥쳐" -조선일보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이 좌파 성향의 선동적 정치인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향해 "입 닥쳐!"라고 소리치는 험악한 상황이 벌어졌다.

스페인 국왕 "차베스, 입 닥쳐" -동아일보
"닥치고 계시지(shut up)!"
좌충우돌 발언으로 정평이 난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10일 돌출 발언을 늘어놓다가 스페인 국왕에게 공개 면박을 당했다.

스페인 국왕-차베스 '막나가는' 회담 -한겨레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이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에게 입을 닥치라고 소리치는 사건이 일어나 눈길을 끌었다.

"파시스트"→"예의 갖추라" →"뭐?"→"입 닥쳐!" -한국일보
중남미 지도자들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이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에게 "입 닥쳐!"라고 고함을 질렀다.

스페인 카를로스 국왕 "차베스, 입좀 닥치라" -쿠키뉴스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이 10일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에게 “입 좀 닥치라”는 모욕적인 말을 퍼부었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스페인 국왕 "차베스! 입닥쳐!" -연합뉴스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이 10일 제17차 이베로-아메리카 정상회담 폐회식중에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입닥쳐!"라고 고함을 지르는 등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외신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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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로이터 연합뉴스



특히 차베스 대통령에게 '좌파 성향의 선동적 정치인', '좌충우돌 발언으로 정평이 난' 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섬세함까지 뽐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작문이 돋보인다.
이 기사들을 읽은 뒤 궁금했던 것은 스페인 국왕이 이 회담에 참석한 배경이었다. 지리적으로 남미에 속하지도 않는 스페인이 남미의 정상회담에 참석하는 이유는 뭘까? 같은 언어권이라서? 스페인이 남미의 많은 나라들을 식민지배하고 착취했던 역사 때문에 스페인어를 쓰는 나라들이 많긴 하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알고보니 스페인이 남미 정상회담에 참석하게 된 이유는 차베스 대통령의 스페인에 대한 '독설'과 스페인 국왕의 품위를 잃은 '입 닥쳐' 발언이라는 사건(?)의 구조적 배경과 일치한다.

스페인 국왕은 아직도 중남미 제국의 황제인가 -프레시안
차베스-스페인 국왕 설전의 진실
스페인 후안 카를로스 국왕과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서로 삿대질을 하며 막말까지 주고받은 설전 해프닝이 중남미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화제가 되고 있다.

<프레시안>의 기사는 그 배경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 차베스를 비롯한 ALBA국가들과 스페인 정부대표들과의 대립은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이베로-아메리카 정상회담을 스페인이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남미 좌파정권들로부터 불만을 사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이 사사건건 이 회담의 상전 노릇을 하고 있는 것도 상당수 국가들은 못마땅해 하는 점이었다. 이 회담을 통해 중남미가 다시금 스페인 제국의 그늘 밑으로 모이는 형국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베로-아메리카 정상 회담이 카를로스 국왕에 의해 창설되었다는 것부터가 남미를 다시 지배하려는 스페인의 숨은 의도라는 말도 나왔다.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은 지난 1991년 영어권 국가를 제외한 중남미 20개국과 스페인,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라틴권 국가들의 외교,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상호 연대와 협력을 꾀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이 회담의 창설을 주도했다.
그러나 중남미 좌파정권들은 이베로-아메리카 정상회담이 스페인 국왕과 총리 주도로 매년 22여 개국 정상들이 모여 수십 가지의 선언문을 채택하지만 실효성은 별로라는 공개적인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지난해 제16차 회담인 우루과이에서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은 스페인 대표들을 향해 "당신들은 지난 500년 동안 우리를 착취한 것도 부족해서 오늘날까지 먹고 살기 위해 조국을 등지고 스페인으로 이주해 일자리를 찾고 있는 가련한 볼리비아인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공개적인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

-프레시안 기사 중 발췌


프레시안의 기사 덕분에 나의 궁금증은 풀렸다. 정상회담에서 벌어진 '설전'은 단순히 개별 정치인 사이의 말다툼 해프닝이 아니었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구조적인 맥락과 배경을 싹둑 잘라버리고 선정적인 팩트만을 골라서 흥미 위주로 쓴 기사는 사실보도이기보다는 사실왜곡에 가깝다. 특히 정치인의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하나에는 정치적 의도와 메시지가 고도로 담겨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단순 팩트만을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왜곡의 위험이 높다.

한편 차베스와 스페인 국왕 간 '설전'에 관한 보도는 한국 언론의 국제보도의 한계를 면밀하게 보여준 사례다. 기자가 현장에 가지 않으면 정확하고 올바른 기사를 쓰기 어려운 법이다. 물론 기자가 모든 현장에 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 직접 갈 수 없다면 간접취재의 영역을 최대한 넓히고, 다양한 관점을 취합하는 성실함이 필수적이다.

이 사건(?)을 간접 취재할 때에도 영어로 쓰여진 외신만 참고할 것이 아니라, 남미 현지의 언론 보도도 찾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랬다면 스페인에 대한 남미 국가들의 이해와 인식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파악했다고 보도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한국언론들은 대부분 국제보도에서 외신보도를 그대로 번역해 쓰거나 인용보도하는 데 머물고 있다. 다양한 국가에 특파원을 파견하여 장기적으로 그 국가의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파악하는 시스템이 빈곤하다. 그나마 특파원 파견도 주로 백인 선진국들을 위주로 이뤄진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 언론의 국제보도는 백인 중심의, 선진국 관점을 은연중 따르게 되는 구조적 병폐를 낳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