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임시 야간 숙소'에 대한 단상

임시 야간 숙소 (Bertolt Brecht, 1931)

듣건대, 뉴욕
26번가와 브로드웨이의 교차로 한 귀퉁이에
겨울철이면 저녁마다 한 남자가 서서
모여드는 무숙자(無宿者)들을 위하여
행인들로부터 동냥을 받아 임시 야간 숙소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 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놓지 마라.

몇 명의 사람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브레히트는 '임시 야간 숙소'의 개량주의적 기능을 비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세상을 바꾸는 방법은 될 수 없을지라도, 무숙자들이 하룻밤 눈과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거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닐까.
이 시에서 두번에 걸쳐 쓰인 '그러나'는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이 시를 성급히 읽어버리면, '임시 야간 숙소'를 무의미한 짓으로 치부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나'에 유념하면서 시를 다시 읽으면, 시의 주제는 전혀 달라진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논쟁.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로의 점진적인 이행', 이를 반박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로의 빠른 이행'.
이른바 '개혁'이냐, '혁명'이냐의 논쟁.
'개혁'을 하든, '혁명'을 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임시 야간 숙소'가 필요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개혁'을 하든, '혁명'을 하든, '임시 야간 숙소'를 함부로 비웃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