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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봉사만으로는 지구를 구할 수 없습니다

얼마 전 아는 사람이 태안으로 자원봉사하러 간다며 지나가는 말처럼 저에게 동행을 권했습니다. 저는 대수롭지 않게 사양했습니다. 그 사람도 역시 대수롭지 않게 "맨날 환경, 환경 하더니만..."하고 넘어갔습니다.
그저 일상적인 대화 한토막에 불과했지만, 솔직히 부끄럽긴 했습니다.

태안에 기름 닦으러 자원봉사 가야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안해봤습니다.
대신에 꺼림칙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국가 때문에 인민들이 스스로를 동원해서 노역하고 있다는 생각말입니다.

한국 사회에는 국가가 직간접적으로 인민들을 동원하는 경험이 많습니다. 대부분 '자율적'이나 '자발적'이라는 수식어를 동반한 '봉사활동'으로 포장돼 있습니다. 하지만 명백히 동원일 뿐입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새마을 운동이 대표적일 겁니다. '잘 살아 보자'는 명분으로 '비판적 이성'을 마비시키고 대대적으로 인민들을 동원했던 거지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자발적'으로 동네 청소를 하는 것이 대단한 미덕이고 애국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횡횡했습니다.
쾌적한 생활환경은 기본적으로 국가가 책임져야 할 일인데, 그럴싸한 이데올로기로 포장해서 인민들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했다는 말입니다. 국가가 환경미화원을 고용해서 세금으로 임금을 지급하여 골목길 청소를 하도록 하는 게 옳은 일이지요.

IMF경제위기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인민들을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책임은 명백하게 정부와 고위관료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통분담' 이데올로기가 마치 미덕처럼 인식되고, 인민들이 동원되었습니다. '금모으기' 운동이 기억납니다. 장롱 속의 오래된 패물까지 '나라 살리겠다'며 들고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IMF경제위기에 대하여 책임을 진 고위관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또 부자와 재벌들은 진정 고통을 분담했을까요? 인민들은 정리해고의 칼바람에 수없이 쓰러지면서 '고통분담'에 동원되었습니다.

태안으로 자원봉사 간다는 것도 그들의 순수한 마음과는 무관하게 국가의 무능력, 무책임에 면죄부를 주게 되는 효과를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한번의 충격으로도 원유가 유출되는 단일선체 유조선의 입항을 금지하고 있고, 국제해사기구는 2010년까지 단일선체 유조선의 운항을 금지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아직도 이중선체가 아닌 단일선체 유조선이 버젓이 운항하고 있습니다. 1995년 원유유출 사고를 낸 씨프린스호 역시 단일선체 유조선이었습니다. 12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또다시 단일선체 유조선의 원유유출이라는 재앙을 맞이했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은 화학물질에 관한 안전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기름을 닦고 있습니다. 원유에 노출된 자원봉사자들이 구토와 두통, 호흡기 통증 등을 호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몇 년이 지난 후에도 만성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정부차원의 보건의료 대책은 보이지 않습니다.

연간 100억원 수준이던 긴급방제 예산은 2002년부터 2억원 정도로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대형해양사고가 없었기 때문이랍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준비해두는 예산인데, 사고가 없다고 예산을 줄이다니요! 몇년간 무사고 운전자는 자동차 보험 안 들어도 상관 없나요!

방제작업의 가장 큰 걸림돌도 방제장비의 부족이라고 합니다. 결국 국가 방제능력의 부실을 인민들의 자원봉사가 메우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정부는 "한국에서 크게 배웠다"는 국제 방제전문가들의 말을 홍보하고 있습니다만. 자원봉사의 힘이 없었다면 언감생심이었겠지요.
사고 책임 문제를 밝히는 것도 분명히 해야지요. 법적 책임은 물론이고, 보상할 일이 있다면 해야지요. 인민의 노동력을 공짜로 착취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슬그머니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되겠지요.

언제까지 마땅히 국가가 할 일에 '자원봉사'라는 이름으로 인민들이 스스로 동원해야 할까요?
오해하지 마세요. 자원봉사를 보이콧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원봉사자들의 선한 마음을 조롱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국가의 못된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한다는 것일뿐입니다.
기름을 닦아내는 그 손으로 짱돌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관리대책을 세우도록 국가에 항의해야 하지 않을까요? 다시는 이런 재앙이 없어야겠지만, 혹여 또다시 대형사고가 터졌을 때에도 국가가 인민을 동원하도록 놔둬야 할까요?

어찌되었든 수십만명이 자원봉사에 나서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한 일입니다. 실제 방제작업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한명의 손길이라도 보태져야 한다는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걱정도 있습니다. 수십만명이 아니라 수백만명이 자원봉사에 나서서 유출된 기름이 말끔하게 제거되면, 그걸로 된걸까요?
태안에서 기름을 닦아내고,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석유문명의 편리함에 젖어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다가 태안의 끔찍한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언젠가 또 사고가 터졌을 때 다시 기름 닦으러 자원봉사 가면 문제가 없는 걸까요?

물론 한시라도 빨리 기름을 제거하는 게 중요합니다. 자원봉사에 나서는 한사람 한사람의 선한 마음과 손길이 소중하다는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태안 원유유출 사고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사회적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자원봉사에 대한 칭송만이 울려퍼질 뿐입니다. 석유종속문명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습니다.

석유는 채굴부터 정제, 수송, 소비되는 모든 과정에서 환경오염과 유독물질들을 발생시킵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석유와 화학기술의 편리함은 이러한 사실을 너무 쉽게 망각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점을 말하지 않더라도, 석유는 유한한 자원에 불과합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미 수년 전에 석유생산 정점에 이르렀고, 50년 안에 석유는 완전고갈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태안 원유유출 사고를 기회 삼아, 석유종속문명에 대한 반성과 재생가능에너지로의 전환을 이야기할 때입니다.
자원봉사에 나서는 선한 마음으로도 불가능한 일일까요? 아닙니다.

지구를 구하기 위해 수퍼맨이나 원더우먼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작은 행동들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1주일에 하루라도 자가용을 쉬게 해주세요. 대중교통을 이용하세요. 자전거로 출퇴근한다면 더욱 좋겠지요.
엘리베이터보다는 계단을 이용하세요. 합성세제 이용을 줄이세요. 1회용품 사용을 삼가세요. 사용하지 않는 전원플러그는 뽑아주세요. 근본적으로 소비를 줄이세요.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상상력을 발휘하면 수많은 방법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유일하게 걱정해야 할 일은 너무 쉽게 석유종속문명에 굴복하는 것뿐입니다.

자원봉사의 숭고한 힘이 태안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석유종속문명에 대한 반성과 재생가능에너지를 위한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지구를 구하는 것은 요원해질 것입니다.

예상했던대로 달을 가리켰는데 손가락만 보시는 분들이 있네요. 달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손가락만 보는 분들이 걱정되어서 글을 쓰면서도 거듭 강조했습니다. 자원봉사가 헛수고라거나 무지한 짓이라는 말이 아니라고요.
그리고 자원봉사하신 분들의 마음과 행동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태안에 가서 자원봉사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득이한 개인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 자원봉사 방식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자원봉사자들은 선한 사람들이고, 태안에 가지 않은 사람들은 부도덕한 존재라는 식의 분위기에는 수긍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식의 이분법적 사고는 지양해주시기 바랍니다.

위 글에서 '동원'이라는 표현은 '예비군 동원' 할 때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단순히 사전적인 의미나 물리적인 차원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인민들이 어떠한 일에 집단적으로 나서고 있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사회과학적 표현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자원봉사 간 인민들이 정부로부터 무슨 전화나 공문을 받고 동원되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