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새해 화두는 이념대로 살아가기

대학시절 환경사회학이라는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다. 담당 교수 A는 내가 아는 사람 B와 아는 사이다. 그러다보니 A교수와 나도 아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날 B에게 반 우스개로 '환경사회학을 가르치는 사람이 왜 자가용을 타고 다녀?'라고 의문을 던졌다. 그 말이 A교수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수업시간에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A교수는 학생들에게 그 말을 들려주며 '재미있는 학생'이라고 했단다.

뜬금없이 옛날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내 삶의 새해 화두로 삼을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평화교육학자 고병헌은 "가장 훌륭한 평화교육 방법은 자신이 실현하고픈 평화가 녹아난 삶을 학생 앞에서 살아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평화를 실현하는 방법은 그 평화대로 사는 것"이라는 명료한 지침도 있다. 간디의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교육이 처해 있는 문제적 상황들은 수두룩하다. 내가 보기에,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배움과 현실의 괴리에 있다. 교과서에 나오는 민주주의(매우 제한적인 개념에 불과하지만!)는 교실에서조차 박제화된 활자에 불과하다. 학교는 민주주의에 관한 신화를 주입시킬 뿐,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체험할 기회를 봉쇄하고 있다. 과장되고 사이비같은 측면이 있긴 하지만 한국사회가 이른바 '인권신장'을 상당히 이뤘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고 했던가! 학생들은 머리카락 길이조차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한다.

수업시간에 민주주의를 역설하던 교사가 학생들에게 권위적이고 억압적이라면 학생들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 어제는 '천부인권설'을 가르친 교사가 오늘은 교문 앞에서 살벌하게 두발단속을 하고 있다면 어떤 것이 진짜일까? 괴리는 이처럼 극단적인 사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발언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 행동이 필요할 때 외면하는 것도 괴리이다.

어느 교사가 사회정의에 대하여 열정적으로 수업을 했는데, 학생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생님, 현실은 달라요!"

단순히 언행일치를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에 관한 것이다.

김규항은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글을 썼다.

어떤 사람들은 한없이 사나운 얼굴로 말한다. ‘세상이 바뀌려면 사회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한없이 온유한 얼굴로 말한다. ‘세상이 바뀌려면 내가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현명한 사람들은 조용히 말한다. ‘세상이 바뀌려면 사회구조도 바뀌고 나도 바뀌어야 한다. 둘은 본디 하나다.’
2007년 6월 8일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회주의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생활이 사회주의인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가면서 세상은 그만큼 바뀐다고 믿는 편이다.

세상을 바꾸는 길은 이념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념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념은 숭고한 것일 수는 있으나 거창한 것은 아니다. 강남의 부자들이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를 지지하는 것도 이념대로 사는 것이다. 생태주의자가 육식을 반대하고 채식생활을 하는 것도 매우 자연스럽게 이념대로 사는 모습이다.

물론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일이다. 이념대로 살지 않는다고 해서(또는 살지 못한다고 해서) 쉽게 비난하거나 불신하는 것은 좋지 않다. 복잡함과 갈등으로 얽히고 설킨 누군가의 삶을 쉽게 단정지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이다. 또 오롯이 개인의 의지와 결단만을 촉구하기에는 사회적 현실이 만만치 않을 수 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위에서 이야기한 A교수가 환경사회학을 가르치면서 자가용을 타고다닌다고 해서 자격미달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성급하고 무례한 행동이 될지도 모른다. A교수가 자가용을 거부하고 대중교통과 자전거, 보행을 주요 교통수단으로 삼기에는 불가피한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을 수 있다. 하루에도 여러 대학을 옮겨다니면서 강의를 해야 한다거나, 활발한 사회활동 때문에 신속한 이동이 불가피하다는 현실 같은 것 말이다.

물론 이러한 현실들이 모든 것을 면죄해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원하지 않지만 불가피한 삶의 방식이 존재할 가능성은 항상 배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줄타기가 될 수도 있다. 도대체 어디까지 용인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문제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 긴장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내가 아는 C교수는 '녹색도시'에 관심이 매우 많다. 자전거이용 활성화를 위한 연구나 강연, 토론회에도 열성이다. 지방의원 선거에 출마한 적도 있는데 꽃바구니를 단 자전거를 타고 선거운동을 했다. 선거용 이벤트일 수도 있다. C교수의 자가용을 얻어 타고 타지로 갈 일이 있었다. 그의 운전은 참으로 얌전했다. 차분한 그의 성품 탓이기도 하겠지만, 그는 자동차 운전에 대하여 자기합리화보다는 자기반성적인 태도를 가졌다.

내가 아는 D형의 경우도 비슷하다. 하는 일의 성격상 자가용 운전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D형은 항상 미안해 한다. 비슷한 방향이면 누구든지 동승해서 가려고 노력한다. 혼자서 화석연료를 태우고 가는 것은 '죄악'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불가피함에 대한 미안함과 섬세한 노력들은 이념의 진정성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럼으로써 이념과 삶의 방식 사이의 어쩔 수 없는 괴리에 대한 실존적인 성찰을 줄기차게 스스로에게 촉구하는 것.

당연한 말이지만, 이념대로 사는 방법의 핵심은 자신의 이념과 삶의 방식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신의 이념에 비추어 문제라고 생각하는 상황이 있다면, 자기 삶의 방식이 그것의 원인이 되지 않도록 살아가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그리고 이념과 삶의 방식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와 갈등에 좌절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인간의 삶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각자의 생각을 가지게 마련이고, 그 생각들이 완전하게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계가 아닌 이상, 근본적으로 주체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인간이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대하여 각자의 방식으로 창의적인 대처를 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낳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현실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개인들이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인과 사회 사이의 갈등도 운명적인 것이다.

평화학자 요한 갈퉁에 따르면, “갈등이란 그냥 이유 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자연적으로 없어지거나 타인의 개입에 의해서 증발하는 것도 아니며, 갈등의 안락사를 통하여 박멸되는 것도 아니다”.

이념과 삶의 방식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이념대로 사는 데 디딤돌이 될 수 있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실존적 문제들에 대하여 이념대로 살고자 하고, 올바른 결정을 하려고 한다면 복잡하고 괴로운 갈등의 연속을 피할 수 없다.

무엇이 정의로운 것이고,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채 주어진 대로 살아간다면 만나지 않아도 될 갈등을 이념대로 살려다보니 괴롭게 대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념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러한 갈등을 외면하거나 갈등의 부재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적인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상상력 발휘의 과정이다.

갈등이 기본적으로 문제적 상황이라는 측면은, 갈등이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발전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따라서 갈등은 극복이나 제거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공존의 대상이다. 이념대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갈등을 자신의 삶 속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이다.

교양을 쌓고, 이념으로 구축하며, 이념대로 살아가기(또는 그러려고 노력하기).
2008년 새해, 아니 평생의 화두다.
단, 화두에 목청 세우기보다는 생활이 화두를 압도할 것.

*위의 글은 본인의 석사학위논문의 문제의식과 일부 내용, 고병헌의 책 <평화교육사상>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