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의문

메일 정리를 하다가 레포트를 하나 발견했다.
2006년 2학기 때 수강했던 <교육과정 및 교육평가>라는 교직과목의 레포트다. 레포트의 주제는 “지금까지 학교에서 배운 것 중 내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의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러한 주제를 제시한 의도와는 꽤 어긋난 레포트다. ㅋㅋ


의문

학교로부터 내가 배운 건 팔할이 ‘의문’이다. 배움 자체가 의문스러운 적도 많았으니, 학교는 나에게 의문투성이였다. 내가 학교로부터 배운 건 의문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학교는 학생의 의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잘 먹고 잘 살려면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고 했지만, 학교는 좋은 대학에 가면 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하긴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은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암흑의 시기였다. 고등학교 시절 수업시간은 지식을 탐구하거나 진리를 체득하는 과정이 아니라, 모든 의문이 ‘학살’당한 침묵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쇠는 때릴수록 단단해지고, 의문은 억누를수록 커진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누구와도 교류하지 못했던 나의 ‘의문’은 대학에 와서야 조금씩 길을 찾기 시작했다. 대학은 나에게 “사물은 보이는 것과 다르다”는 명제를 알려준 최초의 학교였다.

그 후로 나는 무언가를 인지하고 판단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이거나 올바른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떠올린다.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현상과, 그 이면의 본질은 전혀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기존의 편협하고 기계적인 세계관을 조금씩 수정할 수 있었다. 또 내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사물과 현상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사고함으로써 좀더 진실에 근접한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면, 징병제에 대해서 나는 의문을 갖는다. 법률에 규정된 조건을 충족시키는 대한민국의 남성은 징병된다는 사실은 보통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국가가 국민의 신체에 부과하는 강제성을 나는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징병제에 대한 나의 의문은 모병제가 좀더 국민의 자유를 신장할 수 있는 제도일 수 있다는 판단을 가능하게 한다. 심지어 군대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가지면서, 평화에 대한 진지한 사고를 할 수 있다.

의문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편견을 제거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나는 이러한 의문을 갖는다. 왜 대개 사람들은 동성애를 혐오하는가? 동성애자들이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그들을 혐오하는 것은 정당한가? 이러한 의문은 동성애에 대한 정보가 상당히 왜곡되거나 잘못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을 포착하게 해준다. 왜곡된 정보와 지식이 바르게 수정됨으로써 동성애에 대한 인식은 좀더 개방적으로 바뀐다. 나아가 다양한 성적 취향에 대하여 자연스러운 것으로 수용할 수 있는 태도를 갖게 된다.

인간과 사회에 대하여 의문을 갖고 사고하는 습관은 사회학과 철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 때부터 ‘의문’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의구심이 아닌 삶과 진실에 대한 열망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의문’은 내면적인 과정에서 머물지 않고, 실천의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나의 ‘의문’들을 실천의 영역에서 표출할 수 있었던 공간으로 학생운동을 선택하였다. 학생운동은 내 삶의 한 시절을 꽉 차지했다. 나름대로 격렬했던 한 시절이 물러가자 ‘의문’은 지식 탐구의 열망이 되어 나를 충동질했다. 이 때 사회학을 부전공(이는 나중에 교육대학원에 진학하여 교원자격증을 받을 수 있게 한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하게 되었고,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 읽는 즐거움을 맛보게 되었다.

수강신청할 때 주전공 수업은 뒷전을 밀려나고 대부분 시간표는 부전공인 사회학과 수업으로 채워졌다. 사회학 수업을 들으면서 사회의 ‘실체적 진실’을 향하여 한걸음씩 다가갈 수 있었다. 사회학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새로운 것으로 만들고, 우리에게 낯선 것을 익숙한 것으로 만든다”.

사회학 강의를 들으면서 내가 얻을 수 있었던 것 중의 하나는 사회를 보는 관점의 훈련이었다. 보여주는 대로 보고, 보이는 대로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편견에 사로잡히거나, 오류에 빠질 위험이 크다. 그리고 자기의 관점을 정립하지 못한 채 남의 관점을 답습하거나, 무비판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것은 사회와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하고 진실한 성찰을 어렵게 만든다.

사회에 대한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사회와 그 현상에 대한 비교적 일관된 입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고, 그 입장에 따라 자신의 삶의 방향과 위치를 예측하고 계획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관점은 단순히 사회에 대한 분석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삶의 기회를 점차적으로 확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학교로부터 배운 ‘의문’은 나에게 있어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어느 철학자는 진리를 찾는 철학자와 황금을 찾는 모험가를 적절히 비교했다. 철학자와 모험가의 공통점은 목표의 실존을 남들보다 크게 확신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목표를 찾기 위해 모험가는 어떤 곳을 뒤지지만, 철학자들은 모든 곳을 뒤진다. ‘의문’은 ‘목표의 실존’에까지 확대된다. 진리는 존재하는 것인가, 내가 찾는 진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진리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 삼았던 니체의 철학에 관심이 기우는 것이다.

내가 학교로부터 배운 ‘의문’은 공부와 책읽기에 대한 동기를 유발시켰다. 특히 인간과 사회에 대하여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탐구하며, 지식을 축적해가는 인문사회과학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관심, 그리고 학습과 사유에 대한 동기는 나의 삶을 스스로 존중하게 만들었다. 나의 삶을 존중할수록 다른 이의 삶에 대한 관심과 존중의 태도도 조금씩 성숙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학교로부터 배운 ‘의문’은 부정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나에게 있어 결국 인간의 존엄에 대하여 성찰할 수 있게 만든 긍정의 힘이었다. 그리고 ‘의문’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진정한 자기결정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물신화된 사회는 결정된 선택을 강요하면서도 그것이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라고 둘러댄다.

이 때 우리가 사회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존엄과 자유를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선언과 같은 것이다. ‘의문’은 학교가 나에게 준 최고의(또는 유일한?)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