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있는 문제
opinion

문제 있는 문제

6. 다음 자료에서 ㉠과 ㉡을 위한 정책 방향으로 적절한 대답을 한 학생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보기>
갑: ㉠을 위해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의 불법 체류를 철저하게 관리해야 해요.
을: ㉠을 위해 민족 동질성보다는 보편적 인권에 기초하여 국적 취득 요건을 완화해야 해요.
병: ㉡을 위해 최소한 경제적 측면에서 동일한 대우와 권리를 보장해야 해요.
정: ㉡을 위해 한국의 전통적인 사회적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정책을 펴야 해요.

① 갑, 을       ② 갑, 병       ③ 을, 병       ④ 을, 정       ⑤ 병, 정

2008년 9월 시행된 수능 모의고사(교육과정평가원) 사회탐구 정치영역 6번 문제다. 지식요소를 평가하는 문항은 아니니까 당신의 상식과 교양으로 한번 풀어보시라.
나는 틀렸다. 평가원이 공개한 정답은 [② 갑, 병]이다. 정답은 [ ] 사이를 마우스로 긁으면 보인다.

평가원이 밝힌 정답에 따르면, '기존 시민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의 불법체류를 철저하게 관리해야'하는 것이 정책방향으로 적절하다는 것이다.
'기존 시민들의 권익'이라는 것은 바로 일자리와 임금을 뜻할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인의 일자리를 빼앗고, 그들의 저임금 때문에 한국인의 임금도 낮아진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엄밀히 사실(fact)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것을 사실로 증명하고 있는 유의미한 통계나 연구결과는 없는 것으로 안다.

이주노동자 관련 시민단체나 활동가들에 의한 경험적 증언을 통해 대충 추정해볼 수 있을 뿐이다. 한국에 들어와 있는 이주노동자들은 약 67만명 정도 되는 데 절반 정도가 해외동포들이고, 이중 상당 수가 중국 동포들이라고 한다. 이주노동자들은 거의 대부분 영세한 제조업체나 건설현장, 식당 등에서 일한다. 식당이나 건설현장 등을 제외하면 한국인 노동자가 이주노동자와 일자리 경쟁을 해야하는 곳은 거의 없다. 오히려 한국인 노동자들이 기피하는 3D업종의 부족한 노동력을 공급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현실에 맞는 말이다. 실제로 영세제조업체 중에 이주노동자 없이 공장을 돌릴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이주노동자의 불법체류라는 약점과 인종적 차별 등을 이용해 쉽게 착취할 수 있다는 추잡한 이유도 작동할 것이다.

여하간 한국 노동시장의 가장 큰 문제점은 비정규직의 확산과 그로 인한 고용불안과 저임금의 고착화, 실업이라고 보는 데 큰 이견은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노동시장 유연화가 원인이 되어 나타난 문제들이다. 어찌 보면 이주노동자들도 노동시장 유연화의 피해자이다. 오히려 인종적 차별까지 받고 있으니 최악의 노동환경에서 버티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주노동자 때문에 '기존 시민들의 권익'이 침해받다는 것은 일종의 편견이고, 증명되지 않은 주장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편견의 배경에는 인종차별이라는 반인권적 의식이 작동하고 있다. 한국인 대다수도 먹고 살기 팍팍한데, 못 사는 나라에서 온 피부도 까무잡잡한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돈벌이 하고 있는 것을 보니까 아니꼬운 것이다. 그래서 '니네 나라로 꺼져'라고 멸시하고, 그들 때문에 마치 한국인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그릇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공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보다 훨씬 나은 노동환경에서 더 많은 임금을 받고 있는 백인 영어강사들에게는 별 시비를 걸지 않는 것을 보면, 인종차별이 확실하다.

한편으로는, 한 사회가 노동인력을 만들어내기까지 적지않은 사회적 비용이 들어간다. 한국 경제는 이러한 사회적 비용을 거의 들이지 않고 성인 이주노동자를 노동시장에 투입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기존 시민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소모적인 사회갈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이주 노동자든 한국인 노동자든 가리지 않고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이 지켜질 수 있는 노동환경을 만들어 가는 정책이 시행되어야 한다.

위의 문항이 타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이주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침해받은 시민들의 권익이 무엇인지 밝힐 수 있는 사실증명이 있어야 한다. 항간에 떠도는 인종차별적 주장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전제해서는 곤란하다. 더군다나 60만명이 넘는 수능 응시생들이 풀어보는 평가원 모의고사가 이러면 안된다.
문제가 있는 문제다.

*나는 [③ 을, 병]이 답이라고 체크했다. 보편적 인권이란 말에 훅 갔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