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남, 다시 마주 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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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남, 다시 마주 보기 위하여

이 포스터가 가장 마음에 든다. 중년이 된 마이클과 젊은 시절의 한나. 불일치하는 시선까지. 마이클과 한나의 어긋남을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1
사랑을 하면 하나가 될 수 있는 걸까? 사람들은 하나가 된다는 걸 어떤 의미로 생각하는 것일까? 구태한 주례사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처럼 결혼을 하면 하나가 되는 것일까?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사랑을 하면 하나가 되는 일이 가능하기는 하냐고.

#2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원통형 인간'이었다고 한다. 남성과 여성, 양성이 한 몸으로 이뤄진 원통형 인간. 이들이 신에게 도전하기 시작하자, 분노한 제우스가 원통형 인간을 반으로 잘라버렸다. 이 신화로부터 후대의 사람들은 잃어버린 반쪽을 찾고자 하는 욕망을 원초적 에로스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원래 하나였으니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 인간은 에로스적 욕망을 좇으며 살아간다는.


#3
열 다섯살 소년과 서른 여섯 여인의 사랑. 마이클과 한나.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나이는 전혀 중요치 않다.
마이클은 비에 홀딱 젖은 채 건물 벽에 기대 구토를 한다. 이 때 우연히 지나가던 한나가 그를 돕는다. 병이 낫자 감사 인사를 하러 한나의 집을 찾은 마이클. 어쩌다 한나가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보게 된다. 며칠 후 다시 한나의 집을 찾아온 마이클에게 한나는 석탄을 날라줄 것을 부탁한다. 온몸에 검댕이 묻은 마이클을 위해 목욕물을 받아주는 한나. 알몸이 된 마이클의 뒤에서 알몸인 한나가 타올로 마이클의 몸을 닦는다.
그리고 마이클의 몸을 만지는 한나. 한나가 "이거 때문에 다시 온거니?"라고 묻자 마이클은 "You are so beautiful."이라고 한다. 한나의 반응은 "What are you talking about?" 왓.아.유.토.킹.어.바.우.트..........
알몸인 남자와 여자가 입술이 맞닿을 만큼 가깝게 붙어 있다. 그런데 짤막한 그들의 대화는 이 영화의 큰 줄기 하나를 암시한다. 어린 남자는 '당신은 무척 아름다워요'라며 여자를 향한 순수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다. 하지만 성숙한 여자는 뜬금없다는 듯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는 알몸으로 붙어 있지만, 대화는(마음이 표현되는 수단으로서!) 어긋난다. 영화를 끝까지 본 후에야 초반의 이 장면이 갖는 상징성을 제대로 알게 된다.
대화(=마음)는 어긋났지만, 섹스를 통해 마이클과 한나의 몸은 결합된다(또는 결합되는 것처럼 보인다). 대화가 어긋났다는 사실은 둘에게 별 의미를 주지 못한다. 사랑의 시작은 대개 일방통행이기 때문일까. 같은 행동을 하면서도 상대방은 나와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인간관계의 기본조차 마이클과 한나는 잊어버린 것 같다.(어떤 면에서는 그걸 잊어버려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세번째 섹스 후에야 마이클은 한나에게 이름을 물어본다. 한나의 첫 반응은 "이름을 알아서 뭐하냐"는 것이었다. 역시 어긋남이다. 아주 냉정하게 보면, 마이클은 한나에게 연애라는 이름의 사랑을 원했고, 한나는 마이클에게 섹스를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한나가 부도덕한 여자라는 말을 단연코 아니다. 순수한 첫사랑을 시작하는 어린 소년과 혼자 사는 성숙한 여인의 차이. 그저 어긋남이라는 것일 뿐.


#4
작은 오해로 한나는 마이클에게 "넌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라고 화를 내고, 마음 여린 마이클은 쉽게 상처 받는다. 눈물을 글썽이며 마이클은 한나에게 묻는다.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 진심이에요?" 다소 화가 누그러진 한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젓는다. 마이클은 또 묻는다. "나 사랑해요?" 이건 하지 말아야 할 질문. 당황스럽지만, 한나는 긍정의 대답을 '보여준다'. '널 사랑해'라는 음성이 아니라, 화난 듯 당황한 듯 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들려주는 게 아니라 '보여준다'. 마이클이 성숙한 남자였다면 이쯤해서 한나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유는 알지 못하더라도. 여자는 남자에게 어떠한 음성도 들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마이클은 깨달아야 했다. 하지만 어린 마이클에게 한나는 첫 여자다. 두려움과 불안 따위를 마이클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어긋남.


#5
한나는 마이클에게 규칙을 말한다. "너는 나에게 책을 읽어주고, 같이 잔다."
남자는 여자에게 책을 읽어주고, 같이 섹스를 한다. 책을 읽어주는 낭독과 그 소리를 듣는 청음의 행위, 얼핏 아름답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공동행위인 것 같다. 하지만 마이클에게 책 읽어주는 행위는 섹스 이전의 관문과도 같은 것이다. 섹스를 위해 거쳐야 할 어떤 즐거운 행위. 한나에게 마이클의 책 읽기를 듣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중요하다. 시간적으로 이어지는 행위라고 해서 한나가 섹스와 크게 관련되는 의미를 부여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여기서 한나가 문맹이라는 사실은 둘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치이다. 라틴어와 그리스어까지 공부하는 마이클은 여자에게 책을 읽어주는 행위는 달콤한 연애행위 중 하나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하지만 문맹(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녀만의 비밀이기도 하다!)인 한나에게는 섹스나 연애와는 무관하게 새로운 차원의 경험일지도 모른다.
마이클은 책을 읽어주고 한나는 그 소리를 듣고, 그 다음 섹스하지만, 어긋남은 확연하다.


#6
어느날 한나는 홀연히 떠난다.

#7
법대생이 된 마이클. 한 교수가 이끄는 특별세미나에 참여하게 되고, 어느날 나치 전범 재판을 방청한다. 법정에서 마이클은, 피고가 되어 재판을 받는 한나를 보게 된다. 한나는 유대인 수용소에서 간수로 근무한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녀는 돈을 벌어야 했을 뿐이었다. 법정 공방 속에서 마이클은 한나의 비밀을 알게 된다. 그녀는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것을. 그러나 한나는 문맹이라는 사실을 끝내 밝히지 않음으로써, 책임자로 몰리고 종신형을 선고 받는다. 한나에게 문맹이라는 비밀은 절대 밝힐 수 없는 것이었다. 평생 감옥에 갇혀야 한다고 하더라도. 마이클은 자신의 증언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나서지 않는다.


#8
변호사가 된 마이클은 한나를 위해 다시 책을 읽는다. 마이크와 녹음기를 이용해 녹음한 테잎을 감옥에 있는 한나에게 보낸다. 예전처럼 함께 있지도 못하고, 몸을 만질 수도 없지만 마이클은 훨씬 성숙해진 모습을 보인다. 예전의 책 읽기가 결국 자신을 향한 행위였다면, 이제는 한나를 위한 행위가 된 것 같다. 한나도 변한다. 마이클이 보낸 테잎을 듣고, 감옥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온다. 녹음된 음성과 인쇄된 문자를 비교해가며 혼자 글자 연습을 한다. 한나는 마이클에게 짧은 문장으로 편지를 쓸 수 있게 된다.
마이클과 한나는 이제 서로를 향해 상대방의 방법으로 뭔가를 나누는 것처럼 보인다. 이타적 행위보다는 자기애적 행위로 인한 결과로써 어긋남은 최소한 해소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이클은 망설인다. 한나는 열심히 연습한 글씨로 마이클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마이클은 한번도 답장을 보내지 않는다. 녹음 테잎만 보낼 뿐이다.


#9
한나의 가석방을 앞두고 교도소측의 부탁으로 마이클은 임시 보호자가 된다. 한나의 임시 거처와 일자리를 알아보고, 마이클은 교도소에서 한나를 마주하게 된다. 이 장면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백발이 성성한 한나는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마이클에게 테이블 위로 머뭇하며 손을 내민다. 한나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는 마이클.
한나의 첫 마디는 이랬다. "다 컸구나. 꼬마야."
마이클은 그런 한나를 꿈쩍도 않고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손을 거둬들인다. 카메라는, 머뭇거리며 거둬들여지는 한나의 손을 클로즈업 한다. 순식간에 콧등이 시큼해진다.
여전히 어긋남이다.
마이클과 한나가 처음 만나게 된 때부터 감옥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한나에게 마이클은 'Kid'였다. '다 컸구나. 꼬마야.'라는 한마디에서 한나가 마이클을 대했던 모습들의 의미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비에 젖은 채 구토하고 있는 마이클을 따뜻하게 챙겨준 모습, 섹스와 키스를 가르쳐주는 모습, 욕조에서 마이클의 몸 구석구석을 정성껏 닦아주는 모습... 아이를 대하는 엄마의 모습.

#10
책을 읽어주고 그 소리를 듣는 행위는 겉보기에 서로를 향해 있는 것 같지만, 초기의 마이클과 한나에게는 각자 자신을 향하고 있는 의미에 불과했다. 몸은 함께 있을 수 있었으나, 마주 보는 관계가 되지는 못했다. 나중에 직접 만나지 못하는 물리적, 심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향하게 되는 조짐을 보이지만, 역시 어긋남을 극복하지 못한다.
나이가 든 마이클은 결혼생활에 실패한 경험을 갖고 있다. 마이클은 초기에 한나가 느꼈을 사랑의 상처와 두려움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는 마이클이 한나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11
마이클과 한나가 한 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이 사랑했다고 해서 하나가 되었다고도 할 수 없다. 그들의 행위와 마음 속에서 우리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동시에 어긋남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사랑 속에서 발생하는 어긋남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어린 마이클과 한나가 말다툼을 한 뒤 마이클이 "왜 나만 사과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한나가 한 말을 되새긴다.
"네가 사과할 필요 없어. 누구도 사과할 필요가 없어."
사랑이 실패[각주:1]하는 이유는 하나가 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마주 보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다시 철학하는 사람 김영민의 문장을 되새긴다.

"사랑은 마음이 아니라 이별이라는 사건이나 둘 사이를 가르는 그 틈과 사이의 거리를 통해서 살피는 게 훨씬 현명한 짓이다."
  1. 무엇이 사랑의 실패인지는 분명치 않다. 역으로, 사랑의 성공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그렇다. 고백하고 승낙을 얻어 연애를 하는 것이 사랑의 성공인가? 연애는 영원하지 않다. 결혼은 어떤가? 결혼은 제도라는 사실과 그것이 유지(!)시켜주는 관계를 생각하면 결혼을 사랑의 성공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엥겔스의 냉소적 일갈을 상기하자. "어떤 방식의 혼인에서든 사람들은 혼인 이전이나 그 이후나 다름이 없다." 물론 세상에는 성공한 연애나 성공한 결혼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사랑의 성공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사랑의 성공이나 실패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면, 결국 마주 보는 관계 속에서, 우리는 사랑을 확인하고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