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 러브 : '페어'한 사랑
movie

페어 러브 : '페어'한 사랑


'예쁜 영화'라는 게 있나? 예쁜 배우가 나온다거나 배경이 예쁘다거나 그런 거 말고. 그냥 영화가 예쁜 거 있잖냐. 참 오랜만에 예쁜 영화 하나 봤다. 늙은 아저씨 안성기와 젊은 처자 이하나가 보여주는 예쁜 사랑 이야기, '페어 러브'는 예쁜 영화다. 포스터 한가운데에다가 '사랑스런 로맨스 탄생'이라는 글자를 아주 노골적으로 박아 놓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표현이긴 하다만. 이 영화 예쁘다.

남은(이하나)은 형만(안성기)의 죽은 친구의 딸이다. 대략 줄거리는 검색 해보든가, 영화를 직접 보든가 하시고.

이 영화가 마음에 든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종합선물세트처럼 소품과 배경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먼저 카메라. 형만은 오래된 클래식 카메라를 수리하는 사람이다. 콘탁스네 스티글리츠네 하는 말들이 막 나온다. 두번째로 형만은 작업실에서 오래된 LP를 듣는다. 1가구 1디카 시대에 구닥다리 클래식 카메라를 고치고, 클릭 몇번으로 디지털 음원을 내려받아 포터블 기기에 넣고 쉽사리 음악을 즐기는 시대에 LP를 돌리고 있다. 이것들은 자기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 형만의 캐릭터를 잘 보여주는 기능을 한다.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로맨스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고 그렇다.
마지막으로 자전거가 나온다. 뭐 자전거 나오는 영화가 한둘이겠냐만, 페어 러브에는 스트라이다가 나온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삼각형, 스트라이다. 형만의 카메라 수리점 직원이 타고 다닌다. 영화에 나오는 장면은 몇초에 불과하다. 그것도 윗부분만 살짝 나오는데 '앗 스트라이다!'하고 내 눈을 피하진 못했다.ㅋㅋ

영화와는 별 상관 없는 이야기는 이쯤 하고.

'아저씨 예뻐요'하고 은근슬쩍(그러나 아주 확실하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남은. '이 녀석이, 난 네 아빠 친구야'라고 선을 긋는 형만. 형만은 오십대의 노총각이다.
그러나 형만의 마음에 어느새 들어와 있는 남은. 형만은 '이래도 되나' 갈등하다가,
"뭐, 남에게 피해주는 것도 아니고. 너랑 나랑 같이 있는게 문제될 게 뭐냐 이거지. 너도 좋고 나도 좋고. 피해보는 사람도 없는데" 하고 남은과 사귀기로 한다. 이십대 여대생과 오십대 노총각의 연애 행각은 참 예쁘다. 그들이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서도 아니고, 남들은 상상할 수 없는 특별한 데이트를 해서도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연인들이 하는 데이트를 할 뿐이다.
남은은 형만의 작업실 달력에 몰래 자신의 생일을 표시해두었지만, 무심한 형만은 알지 못한다. 주변의 코치를 받고 우리의 노총각은 꽃다발을 사들고 남은의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서운했던 남은은 형만의 깜짝 등장에 웃음꽃이 피고. 몰래 숨겨 두었던 선물을 슥 꺼내서 남은을 기쁘게 해주고.
둘이 택시 타고 가다가 남은이 택시 안에 달려 있던 장식물을 갖고 싶다고 하자 형만은 택시 기사에게 부탁해서 사주고.
뭐 이런 연애 행각이야 다들 하는 거다. 그래서 예쁘다는 거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자행되는 모든 연애 행각은 예쁘다. ㅋㅋ

그러나 연애가 항상 예쁘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당연하게도.

남은 : 기회가 되면 유학을 가보고 싶어요.
형만 : 왜?
남은 :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뭔가 보게요.
형만 : 무슨 돈으로?
남은 :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몰라요?
형만 : 무슨 말 하는지 알아. 아는데. 어쨌거나 돈은 없잖아.
남은 : 꼭 그렇게 기분 나쁘게 말해야 되요?
형만 : 너 돈이 없는 건 사실이잖아. 사실을 얘기하는데 왜 기분이 나빠?
남은 : 돈이 없다는 사실 정도는 나도 알아요. 근데 오빠가 지금 말하는 건 '넌 철없어. 한심해. 너무 어려' 뭐 그런 뜻이잖아요.
형만 : 그렇지 않다니까. 난 솔직하게 사실을 얘기했을 뿐이야.
남은 : 독립을 하라면서요?
형만 : 유학이 어떻게 독립이야? 스물 다섯 나이에 언제까지 어린 애처럼 헤매고 다닐거냐고? 그리고 외국에 나간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남은 : 어떻게 살라고요? 그럼? 난 오빠처럼 기계 고치는 재주도 없어요. 아무거나 하려고 해도 뭘 해야될지 모른다고요.
형만 : 가만히 있어도 세상이 알아서 너한테 좋은 걸 찾아주는 게 아니야. 지금 네가 갖고 있는 걸로 어떻게 잘 살까 맞춰가면서 사는거지.
남은 : 그게 평생 카메라 부품 고치고 살아온 결론이에요? 난 내 눈으로 다 보고 싶어요.
형만 : 응? 그래서? 더 신기하고 재미있고 좋아 보이는 게 있으면 가겠다는거야? 이젠 내가 별로 안 신기해?
남은 : 오빠가 나보다 더 유치한 거 알아요?
형만 : 인생이 그렇게 긴 줄 아니? 아차 아차 두세번만 하면 너도 내 나이야. 17살에 끝낼 고민을 하면서 이것저것 뭘 더 보고 배우겠다는거야? 아무데나 유학만 가면 뭐가 달라져?
남은 : 가겠다고 안했어요. 그래서 물어보는 거잖아요. 막연하게 내 인생도 찾고 독립하란 말만 하지 말아요. 이거 저거 다 안된다는 말만 하고. 책임은 안 질라 그러고. 그러면서 무슨...
형만 : 지금이야 네가 내 곁에 있겠지만, 나중에는 기억도 안날걸. 유학을 하건 뭘 하건, 그 생활이 적응이 돼서 시간이 가면 나 같은 건 잊어버릴거야.
남은 : 그럼 우린 그냥 지나치며 만나는 사이인 거예요? 다른 생활로 가기 전에 잠깐 만나는... 그런 얘기예요? 알았어요.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줄 몰랐어요.

아, 이 어긋남을 어쩌란 말이냐. 이건 단순히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이십대와 '세상은 만만한 게 아니다'는 걸 온몸에 각인한 나이 든 자의 갈등은 아니다. 나이를 제외하고 연인이라는 관계만을 놓고 보자면, 서로가 다르다는 사실에 대처하는 방식이 서툴다는 팍팍한 현실이 남는다.
사랑하는 자들은 언제나 서툴다. 남은이 원했던 것은 '유학'이 아니다. 형만과 함께 할 수 있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지에 대해서 형만과 공유하고 싶었던 거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남은은 형만과의 사랑 속에서 자신의 미래을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다. 그럼으로써 형만을 좀더 알고 싶었던 거다.
하지만 형만의 눈에는 남은의 마음이 보이지 않았다. '공유'라는 주제를 잡지 못하고, '유학'이라는 소재에만 집착해버렸다.
형만의 마음을 몰라준 건 남은도 마찬가지다. 사랑을 시작하기엔 너무 많은 나이에 마음에 들어온 남은을 형만은 잃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돈'이라는 현실을 말하며 거부감을 드러냈는지도. 게다가 형만은 이미 만만하지 않은 세상을 겪어버린 나이라는 걸 남은은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결국 남은은 작업장 울타리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는 형만을 발견했으나, 그런 형만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자신도 할 일이 있다는 데까지 생각하진 못하고 말았다. 최소한 '나이를 먹으면 쉽게 변하질 못'한다는 점이라도 알았더라면.

사랑 없이도 성장할 수 있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질 높은 성장은 사랑보다는 이별 후에야 온다는 게 문제이긴 하다만. ㅋ

남은은 깨닫는다. 형만에게 자신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말라고 했던 것처럼, 자신도 형만에게 그 이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걸. 동시에 형만은 변하지 않는다는 거, 작업장 밖으로 안 나온다는 것까지. 그렇게 말하고 남은은 형만을 떠난다.
이별 장면에서 형만은 대부분의 남자들이 위기의 순간(?)에 남발하는 '내가 다 잘할게' 드립으로 일관한다. '봄날은 간다'의 상우(유지태)도 '내가 잘할게' 드립을 써먹었으나 역시 효과는 전혀 없었는데, 형만은 이 영화를 안 봤나보다. 역시나 남은의 마지막 말은 '자신이 없어요'다.

영화의 엔딩은 '페어 러브'다. 형만의 꿈인지 현실인지 모호하긴 하지만. 병원에 누워 있는 형만에게 남은은 '다시 시작해요'라고 한다.

내가 변할 수도 있고, 내가 무뎌질 수도 있고. 오빠가 변할 수도 있고. 어차피 어떻게 살아도 100%는 아니니까. 매순간, 매순간... 뭐든지 어떤 면으로는 50:50 이니까. 우리 다시 시작해요. 우리 다시 시작해요. 우리 다시 시작해요...

상대방이 변하길 원한다면, 나도 변해야 한다. 나는 변하지 않고, 상대방이 변하기만 원한다면 '페어 러브'가 아니다. '페어'하다는 건 어쩌면 사랑의 조건인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필요조건은 되는 것 같다. 사랑이 무슨 스포츠인 건 아니다만, 어쨌든 페어 플레이 하는 게 좋다.

'페어 러브'는 사운드트랙이 아주 좋다. 영화 보면서 외국 가수인줄 알았는데 김신일이라는 한국 아티스트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