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이기주의

1.
대학 1학년 때였나 싶다. 지금은 사라진 것으로 아는데, 오월대라는 무시무시한 조직이 있었다. 전남대에서 운동권 남학생들이라면 누구나 몸 담았던 '준군사조직'. 서울 쪽에서는 사수대라고 불렀으나, 광주전남권 대학에서는 '전투조직'이라고 했다.
여하간 오월대는 가투에서 전경과 쌈박질하는 게 주요 임무이긴 했으나, 가끔 학내규찰활동도 했다. 늦은 밤 학내를 돌아다니면서 취객 정리, 불량(?) 고삐리 군기 잡기, 오토바이 폭주족 단속, 여학생 보호 같은 경찰 노릇을 하는 거다. 학우들의 안전을 위한 활동이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깃발 들고 구호 외치고 노래 부르며 돌아댕기는 남학생 떼거리를 보고 학우들이 오히려 위협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만.

그건 그렇고.
어느날 긴급히 학내규찰 소집령이 떨어졌는데, 은밀히 모여든 우리에게 대장은 비밀미션을 주었다. 그 시간 전대 안에서 한총련 중앙위가 열리고 있다는. 총학 짱 되면 자동으로 수배자가 되던 시절이라 수십명의 수배자가 학교 안에 있다는 말씀. 우리의 미션은 혹여 전경이 처들어오면 중앙위원들을 학교 밖으로 탈출시키는 거였다.
아 씨바. 이럴 줄 알았으면 술 먹으러 도망갈 걸... 했으나 때는 늦었고.

내가 속한 중대(이거 봐라 완전 군사조직이다. ㅋ)는 정문을 맡았다. 밤 12시가 넘었는데 전경이 몰려오기는커녕 중앙위 한다는 거 구라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루한 시간은 흐르고.
중대장 형이 심심한데 1학년들 이야기나 들어보자고 했다. 주제는 무려 '나는 왜 운동을 하는가?'를 던져줬다. 씨바 무슨 사상 자백하라는 것도 아니고 꼭 해야 됩니까? 하고 우렁차게 반기를 들고.................................싶었으나, 나는 소심했다. 게다가 선배들이 와~ 박수까지 치면서 분위기 굳히기 들어가고... 그래 노래 안 시킨 게 어디냐 하기로 했다. 난 낙관적이니까. ㅋ

한놈씩 일어나서 말했다. 비슷비슷하지 뭐. 사람사랑이 어쩌고... 옳은 것을 실천한다는 신념이 어쩌고... 청년학생의 역사적 사명이 어쩌고... 무려 조국과 민족을 거론하는 열혈청년도 있고. 한명 끝날 때마다 박수치고 뭐 그랬다. 드디어 내 차례. 준비된 썰을 풀었다.

"나는 나를 위해 운동을 합니다. 나는 운동을 하는 게 나에게 이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합니다."

캬~ 존나게 명료하구나 속으로 감탄하며 다시 길바닥에 앉았다. 근데 감탄은 나 혼자 했더랬다. 주변 분위기는 살짝 뜨악했고, 아주 형식적인 박수 소리만 쓸쓸히... 다른 놈들 말하고 나면 선배들이 분위기 업 시켜주고 코멘트도 하고 그러더만. 나한테는 암말도 안하고 넘어간다.
그래도 난 진심이었다. 욕망하는 주체로서 나는 데모를 했다. 아, 물론 술 사주고 밥 사주는 선배들이 없었다면 다른 욕망을 좇아갔을 거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만.

2002년 민주노동당에 가입하고, 아래와 같은 글을 써놓은 적이 있다.

나는 민주노동당에 입당하는 것이 나에게 이롭다고 생각했다. 난 이 세상이 매우 불편하고 마음에 안 든다. 국가라면 최소한 인민들이 주택과 의료 문제에 있어서 별 걱정없이 살 수 있도록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영 아니다. 남성인 내가 보기에도 여성들이 속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이 안된다. 농민들의 삶은 또 어떤가? 농민들의 삶과 내 이익이 무슨 관계가 있냐고? 농민들의 삶이 무너진다는 건 바로 내 먹거리가 무너지는 것이다. 그리고 먼 훗날 목수 겸 농민이 되고 싶은 내 꿈(과연 실현될까?)을 위해서도 농민들은 아주 잘 살아야 한다.

꽃같은 대학시절의 일부를 거리에서 보낸 이유도 같은 차원이었다. 나는 정말로 나를 위해 데모했던 거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을 탈당한 이유도 따지고 보면, 민노당은 더이상 나의 욕망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2.
얼마 전부터 노회찬 팬클럽 '희망찬' 주최로 우석훈이 '사회과학 방법론 기초' 강의를 하고 있다. 공짜 강의이고, 김영사와 예스24가 후원한다. 우석훈은 노회찬의 후원회장인데 돈 끌어모으는 건 재주가 없어서 몸빵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밝혔음. ㅋ

강의 중에 우석훈이 우스개로 이런 말을 했다.
"뉴타운 하면 월세, 전세 올라가요. 근데 월세 사는 사람들이 뉴타운이 좋다는 거에요. 거기 살면 쫓겨나거나 월세 올라가고 그러거든요. 그 때 반대해야 되는데.. 제가 조사해봤는데.. 왜 좋냐고 물어보면 '우리 동네 발전하는 것 같아서' 좋다고 해요. 이런 사람은 설명이 안되는 거거든요. 아까 말했던 합리성 이런 걸로 보면... 진짜로 이타주의에요."

가난한 사람이 부자 배 불려주는 일에 박수치는.... 슬픈 '이타주의'. 홍세화 선생은 '존재를 배반한 의식'이라고 했던. 인민들의 '이타주의'를 조장하며 국가와 자본의 이기주의는 번창한다.

자신의 계급에 기반한 이기주의가 표출되는 투표행위가 바로 계급투표다. 노동 계급의 욕망을 자본가 계급의 이익과 일치시키는 사람들이 '계급'을 느끼는 순간이 잦아질수록, 그런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날수록 세상은 바뀐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진짜 이기주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