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10년 전의 일기

봄여름가을겨울의 노래 '10년 전의 일기를 꺼내어'를 들으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오늘은 낡은 책상 서랍에서 / 10년이나 지난 일기를 꺼내어 들었지 / 왜 그토록 많은 고민의 낱말들이 / 그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지

정말 좋은 노래는 종종 '이거 완전 내 이야기잖아!' 하게 만든다. 10년 전의 일기를 꺼내어보았다. 낡은 책상 서랍은 아니고 컴퓨터 하드디스크에서 꺼내긴 했지만. 뭐.
정말 뭔 놈의 '고민의 낱말들이 그 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지' 모르겠다. 답 안나오는 관념들을 붙잡고 혼자 폼잡고 있었던 모습을 생각하니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만. 다들 그럴 나이 아니었냐 막 이래.


나는 누구인가, 누가 나인가 / 2000년 *월 *일

문득 이 말이 떠올랐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의 시다. 이와 비슷한 말을 어느 곳에서 읽은 기억도 난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느 작가는 탄광촌에 갔다가 "그 탄광촌의 어느 거리도 함부로 힘주어 밟지 말라. 그 땅 밑 어딘가에서 우리 광부들은 언제 무너질지 모를 땅 속에서 땀흘려 탄을 캐고 있으니..."라는 글을 만들었다.
참으로 마음이 부끄럽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너무 쉽게만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처음부터 끝까지 물고 간 화두다. 배용균 감독은 시종일관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놓고 아무런 해답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스님, 어디로 가세요?'라는 동자승의 질문에 아무 대답없이 홀연히 사라지는 스님처럼.

우리는 삶 속에서 수만가지의 것들을 경험하면서 기뻐하고, 괴로워하며, 슬퍼하고, 즐거워 한다. 하루에도 수십번 감정의 기복을 경험하면서도 우리는 '당신은 행복한가?'라는 물음에 선뜻 답을 내놓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행한가? 역시 알 수 없는 문제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 화두의 핵심은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보자.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가? 여기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덧붙여 보자.

나는 누구인가? 아직 철이 들지 않았을 때 -그렇다고 지금 철이 다 들었다는 말은 아니다- 이 물음은 나에게 아주 훗날의 일로 여겨졌다. 그래 내가 좀 더 나이가 들면 그 고민을 아주 깊이 있게 해보자. 대충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세월이 이만큼 흘렀다. 철 좀 들어라는 면박을 어느 정도 듣지 않아도 되는 나이다. 그런데 여전히 이 물음은 훗날의 일처럼 여겨진다. 솔직히 피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의 정답을 찾게 된다면 삶의 목적과 의미를 잃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우리네 인생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두려움은 나에게는 실제적인 공포이다. 그러나 이미 그 물음은 우리가 살아가는 원동력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도 없다. 화두의 본질적인 의도는 정답 구하기가 아니다. 항상적인 질문을 통해 자신을 갈고 닦고 보살피고 반성하며 전진하도록 스스로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항상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정답의 근사치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몸부림. 이것이 바로 그 질문의 진짜 의도인 것이다.

자, 이제 나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대변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조원종'이라는 이름?, 신방과 재학생?, 24살의 청년?, 신문방송학과 예협장?.... 나를 객관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은 많이 있다. '나' 이외의 사람들은 나의 객관적인 조건과 위치로 '나'를 인식하는 데 그리 힘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나'의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나'의 진짜 모습을 감추고 왜곡시키는 기제가 될 수도 있다. 나에게 주어진 객관적인 조건들에 맞춰서 살기 위해 자신을 포장하고 헛된 것을 희망하는 오류를 범할 우려가 있다. 허상에 불과할 수도 있는 조건들에 의해 규정되는 '나'는 이미 내가 아니다. 단지 현실의 객관에 의해 주체를 상실한 채 객체로 머물게 된다. 그렇다고 현실의 객관이 전혀 의미없는 것만은 아니다. 난 개인적으로 현상과 본질을 확연히 구분하려는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현상과 본질은 이분법적으로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서로 교통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상을 전적으로 무시한 본질은 의미가 없다.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흘러가버렸다. 원위치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또 다시 누가 나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누가 나인가? 누가 나여야 하는가? 이걸 다시 나는 누구이고 싶은가? 무슨 말장난 같지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나'의 지향을 설명하는 것이지 않나 싶다. 논리적이지도 못하고 과학적이지도 못하지만 이런 식의 비약도 괜찮은 것 같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지극히, 철저하게 철학적인 질문이 현실에서 참다운 의미를 갖는 것도 그런 지향과 정진이라는 속뜻이 있기에 가능할 것이다.
요즘처럼 디지털이 세상을 어떻게 해버릴 것 같은 시기에 이런 고리타분한 철학적 질문은 어쩌면 무모한 짓일지도 모른다. 벤처와 인터넷, 코스닥이 세상의 최고가치인 듯 요란한 시기,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할 사람을 만나고 싶다.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을 타인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던져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는, 인간의 얼굴을 한 진짜 사람말이다. 어찌보면 그런 질문은 인간에 대한 예의인 것도 같다. 서로에 대한 예의말이다. 
자, 이제 그만 미친 바람 잠재우고 예의를 차렸으면 좋겠다.
'나'에게 물어보라.
그리고 그 지향을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