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이별은 없다
diary

짧은 이별은 없다

매일 아침 잠이 깨면 이별한건지 아닌지 분간할 수가 없다. 그러다가 정신이 들면서 엄청난 무게감이 가슴을 짓누른다. 그래 이별이다. 연락하지 말자고 했다. 날마다 아침이면 그 무게감을 안고 하루를 시작한다. 날마다 끌고 다녀야 하는 커다란 무게감. 밤이 되면 무게감은 더욱 커진다. 다리가 후들거려 잘 걷지도 못한다.

온갖 복잡한 것들을 다 털어내고 남는 것은 하나다. 그에게는 그녀가 필요하다. 무엇으로 그 마음을 억누를 수 있을까?

내일이면 그녀는 그에게 다시 중요해질 것이고, 그는 수없이 마음을 억누르고, 진심인지 아닌지 자신도 알 수 없는 말들을 그녀에게 내뱉고, 수많은 패배를 겪을 것이다.

하루, 3일, 일주일, 한달, 그리고 1년..... 그렇게 혼자서 참아야 할 일이다.

결혼생활에서 진정한 잔인함은 늘 일상적인 것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그 사람이 옆에 있고, 옷을 갈아입고 ‘사랑한다’며 입맞춤을 하고 각자의 일터로 떠난다. 그러고 나서 피곤한 몸과 마음으로 서로의 무사귀가를 확인하고 안도하며 잠자리에 든다. 습관이 되고 반복된다. 매일 아침의 입맞춤은 더 이상 사랑의 증표가 되지 못하고 날마다 치러야 하는 일과가 되어버린다. 좀더 시간이 지나면 그것마저 생략해도 누구도 서운하지 않은 끔찍한 일상이 된다.

물론 이것은 반복되는 습관적 일상 사이사이에 서로에게 긴장과 설렘과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아주 사소한 노력들이 부재할 경우의 이야기다. 사소한 노력과 작은 행동만으로도 일상의 잔인함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그런데 사소한 노력은 일상의 잔인함을 깨달을 수 있을 때 가능하다. 그 잔인함을 느끼지 못하고, 일상을 습관처럼 받아들이고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는 식으로 용인하게 되면 결혼생활은 그와 그녀의 행복한 삶이 아니라 유지되어야 할 계약이 되어버린다. 화조차 나지 않고, 특별한 설렘과 기대도 없으며, 그저 하루 하루 버티면서 사는 팍팍한 인생.

그는 속으로 말했다.

'난처한 일이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그는 단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만 하면 충분해. 이건 정말 견딜 수 없는 일이야. 행복을 선택할 용기도 없는 못난 여자를 향한 터무니 없는 나의 열정.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 그저 질투할 뿐이지. 그나마 이런 마음도 오래 가진 않을거야.'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 말은 진실일 테지만,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그가 그녀에게 그들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자, 그녀는 그에게 사랑의 짧음에 대해서 말했다.

"일년 후 혹은 두달 후,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게 될 거에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이별의 사전공고를 듣는다면 대부분 실망과 상처에 고통스러울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격렬한 본능만을 철저히 믿고 살아왔던 사람처럼 사랑의 지속성을 믿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하지만 그녀는 사랑하는 시간에 대한 온전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는 생각한다. 사랑이 짧은 것이라면, 그 시간동안이라도 더 많은 더 열정적인 더 행복한 사랑을 나누고 싶을 뿐이다. 그것이 가져올 결과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뜨거운 사랑의 온도가 내려간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을 부정하는 근거는 아니라는 점이다. 사랑의 모습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래서 그는 그녀와 평생토록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어떠한 때가 되면 그 모습을 달리 하면서. 이런 점에서 사랑은 변치 않을 수 있다고 믿으니까.

그는 그녀가 필요하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최소한 앞으로는 사랑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 세 가지의 명제는 일련의 고통과 무력함을 내포하고 있다. 그가 거기서 벗어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난 당신을 사랑해요. 물론 난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니, 사랑하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이 말을 하면서 단 한번도 그녀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그녀의 눈빛에서 사랑이 느껴지지 않으면 정말 무너져버릴 것만 같아서다. 그는 그녀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붙들어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 시간들, 웃음들, 따뜻한 눈빛들, 그녀의 어깨 위로 쏟아지던 햇빛, 미세하게 떨리던 그 입술, 수없이 주고 받았던 대화들, 가슴으로 들었던 그녀의 말들, 살며시 포개고 부드럽게 어루만졌던 손의 감촉들, 아련히 샴푸 냄새 풍기던 그녀의 머리카락, 마치 또다른 나와 나란히 걷고 있는 것만 같았던 그 느낌들이 다시 가능할까?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미안하다는 말인가?' 그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는 말했다.

"미안해 하지마."

그 말은 본능과 같은 것이다. 암컷을 안심시켜야 하는 수컷의 역할을 한 것일 뿐이다. 미안하다는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그의 마음은 쓰라렸다.

'미안해 하지 말아요. 그건 힘든 일이잖아요. 난 괜찮아질 거에요. 아니요. 그 미안함 절대 잊지 말고 평생 간직하고 살아요. 나를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사실이잖아요. 당신이 미안해서 많이 힘들었으면 차라리 좋겠어요. 아니요. 당신도 힘들고 괴롭다는 거 잘 알아요. 그러니까 그 미안함이라도 내가 덜어줄게요. 다 이해해요.'

그녀의 말 한마디에 그의 마음은 수천갈래로 찢어졌다.

'난 당신을 원망해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난 당신을 원망해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난 당신을 원망해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난 당신을 원망해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난 당신을 원망해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난 당신을 원망해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난 당신을 원망해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난 당신을 원망해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난 당신을 원망해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난 당신을 원망해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난 당신을 원망해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행복했어요. 다시는 가질 수 없을 만큼. 그것이 내 인생의 유일한 행복이었다면 당신 덕분이에요."

그는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나도 행복했어요. 그 시간 함께 해줘서 고마워요.'

그러나 그는 그녀를 원망해야 했다.

그 행복이 그에게는 너무나 커서, 잊을 수 없이 새겨져 있어서 그는 다시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랑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는 알지 못한다. 이제 알지 못하게 되었다.

책임진다는 것은 단순히 의리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부족한 것을 대신 해주는 것. 그것도 사랑 맞다. 희생과 헌신, 사랑에 필요한 행동들이다. 하지만 그것만 있어서는 힘들어서 사랑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 책임진다는 것은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더불어 나도 행복해지는 것이다.

이미 사랑이 식어버렸는데 의리 지킨다고 옆에 있는 것은 오히려 무책임한 것은 아닐까. 지금은 노력한다고 다짐하고 나름대로 실천도 하고 있지만, 지금의 긴장상태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 예전처럼 되돌아가지 않을까.

셀 수 없이 많은 사랑에 대한 말들. 그것들은 모두에게 맞는 말이고, 동시에 모두에게 틀린 말이다.

그녀가 말하는 '현실'. 그것은 그녀가 그를 선택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가 아니라, 그를 선택했을 때 겪을지도 모르는 어려운 일 중 하나이기를 그는 간절히 바랬다. 다 떠나서 그는 그러한 현실적 제약들을 극복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기보다는 그녀와 함께라면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그녀는 그 남자를 참고 살 수 있다고 했다. 10개 중에 5개만 맞아도 살 수 있다고. 어차피 결혼하고 세월이 지나면 똑같아진다고도 했다.

그는 생각했다. 몇 년 간은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평생 그렇게 참고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눈을 바라보면서 '사랑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과 한 공간에서 일상을 보내고, 그 사람의 냄새와 손길과 감촉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 것은 대단히 피곤한 일이다.

한편으로는 그러한 결혼생활이 평온한 생활을 가져다 줄 수는 있다. 아무런 열정도, 질투도, 긴장감도, 설렘도, 그리움도, 불안감도, 배신감도, 기다림도, 흥분도 없는 끔찍한 평온함.

그는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기 위해, 그를 덜 힘들게 하기 위해 천천히 이별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또 그러한 방법이 그녀 자신을 덜 힘들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생각했다. 이별이 덜 힘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이별을 제거하는 것 뿐이라고. 이별은 원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니까. 그 괴로움을 덜어줄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섹스를 하다가 신음소리처럼 '사랑해' 한 적은 두어번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사랑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모호함 감정이라고 생각해서인지, 단순히 직접 표현하기가 부끄러워서인지, 사랑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서인지, 언젠가는 식어버릴 사랑에 대한 불안감에 애초부터 사랑이 아니라고 믿으려고 했던 억지인지 그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는 이별과 이별할 때까지 이별중이다. 그는 1년쯤 지나면 끝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쯤 되면 덜 힘들 것이라고, 그 정도면 살만 하다고 믿을 뿐이다. 사랑과 이별의 시간은 비례할 수도, 반비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별의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최소한 이별을 겪고 있는 이에게는 그렇다고 그는 생각한다.


-2009년 5월에 소설을 가장해 쓴 잡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