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책에 쌓인 게 먼지 뿐이랴
diary

오래된 책에 쌓인 게 먼지 뿐이랴

부모님 집에 갔다가 오랜만에 예전 내 방에 들어갔다. 벽 하나를 꽉 채운 책장에 오래된 책들. 임용시험 공부할 때 보던 수험서들도 그대로 있다. 아빠는 내가 공부한 게 아깝다며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다. 나는 임용시험 접으면서 버리자고 막 그랬는데 오래 전부터 그냥 내버려둔다. 아빠의 애잔함도 나름 지켜주고 싶고. 그건 그렇고 먼지 쌓인 책 몇권 골라서 가져왔다. 내 삶의 한 궤적을 보는 것 같아서 순간 울컥. 오래된 책들에 쌓인 건 먼지 뿐은 아니구나. 나에게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 하고 잘 살아온 나를 토닥토닥 해줬다.

무려 1984년에 초판 1쇄가 나온 니체 전집 중 한권. 내가 초등학생 때 니체를 읽은 건 아니고, 헌책방에서 산 거다. 저 도장은 예스24에서 책 많이 샀다고 사은품으로 보내준 것. 책을 사면 항상 저 도장을 찍어서 소유권 표시하곤 했다. 책은 나누는 건데 나는 소유와 소장에 집착했던 그런 시절이다.


격하게 공감했나보다. 저리도 굵게 밑줄을 쳐놓다니. 특별한 성찰이나 대단한 진리가 담겨 있는 것도 아닌데, 같은 책의 같은 문장도 읽는 당시의 상황과 심정에 따라 가슴을 팍 치는 의미가 남달라지기도 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이다. 군대 시절 휴가 나왔다가 사들고 간 책. 군대에서 책 읽으려면 보안성검토라는 걸 받아야 했다. '불온서적'을 막으려고 하는 짓인데, 지금도 저런 걸 하는지는 모르겠다. 남들은 휴가 나오면 사제 담배 같은 걸 사서 복귀하는데 나는 항상 서점에 들렀다. 휴가 중에 사들고 복귀한 책들이 나름 '불온서적'이라 심장이 벌렁거리긴 했는데,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그런가. 한번도 보안성검토에 걸린 적은 없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비빔툰'. 지금 봐도 대단한 만화다. 야야툰은 참 솔직한 성 이야기를 보여준다. 연인이든 부부든 함께 읽고 키득거려도 좋고, 생각할 거리도 꽤 많다. 비빔툰에 대해서는 이런 글을 남긴 적이 있다.


유명인의 사인 같은 거 뭐 대수냐고 하는 편인데, 전대에 강연하러 온 조정래 선생님의 친필 사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이 책은 표지가 접힌 흔적 조차 없다.


나를 항상 '아우'라고 불렀던 '누이'가 읽어보라고 선물해준 책에 적혀 있는 글. 하지만 누이는 나에게 읽어보라고 책을 주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돌려봐야 한다는 말은 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누이는 인권운동한다고 홍콩으로 떠났고, 몇 년만에 돌아와서 같이 밥 몇 번 먹었다. 지금은 행방불명, 연락두절. 그리고 이 책은 여전히 나에게 있다. 지금은 이 책의 일독을 권해줄 만한 사람이 주위에 없다. 내 삶은 이렇게 달라졌다. 그나저나 그 누이는 어디서 뭐하고 사는지. 나에게 친동생처럼 잘해주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