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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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5·18

내가 뜨거웠던 시절, 5·18은 항상 거리 위에서 최루탄과 짱돌 속에서 외치는 이름이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시험에 나오는 것)만 알았던 대학교 1학년 시절, 그 해는 전두환과 노태우 등 학살자들에 대한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해였다. 그해 여름,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공소권 없음'이라고 발표했고, 광주는 난리가 났으며, 거리는 '학살자 처벌'과 '5·18 특별법 제정'이라는 구호로 덮였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은 특별법 제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전두환과 노태우 등 학살 주범들이 법정에 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곧 특별사면되었다.

처벌과 단죄는 턱없이 불충분했고, 진상규명은 '군사기밀'과 양심선언 부재 등을 이유로 미완에 그쳤다. 제대로 이뤄진 것 없이 5·18은 국가기념일이 되었고, 묘역은 국립묘지로 새단장되었으며, 해마다 대통령의 참석 여부가 뉴스거리가 되고, 유력 정치인들은 앞다퉈 참배를 한다.

5·18 38주년, 참 다행한 것은 '진상규명' 목소리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발포명령, 헬기사격, 여성 성폭행, 시신 암매장, 행방불명자 등 여전히 묻혀 있는 진실을 우리는 반드시 역사에 기록해야 한다. 학살자의 정당과 손을 잡고(그들은 '3당 합당'이라고 하지만) 정권을 잡은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5월 특별담화에서 "진상규명과 관련해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이는 훗날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라고 했다. 권력자들의 '역사에 맡기자'는 말은 늘 진상규명하지 않겠다는 자백이었다. 진상규명은 역사에 맡길 일이 아니라, 바로 살아 있는 우리가 할 일이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상설 전시 & 416기억저장소와 함께하는 시민 기억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공동기획 전시 <가자! 도청으로! - 5월 27일 이전과 이후, 애서(哀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