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 이제 체계를 불태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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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 이제 체계를 불태워봐

*영화 '버닝'에 대한 스포일러 있음.


모든 것은 모호하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없다. 벤이 해미를 살해했을 것이라는 의심은 있지만, 확신은 없다. 종수는 기껏 고물 트럭을 타고 벤의 뒤를 미행하지만, 금새 들켜버리고 벤의 포르쉐는 유유히 고물 트럭을 따돌린다.

친절하게도 영화는 벤이 연쇄살인마이거나 소시오패스라는 여러 정황들을 보여준다. 늘 웃고 있고 매너와 여유를 보여주지만, 금새 지루해하고, 울어본 적이 없으며, 음식을 하는 이유는 '내 마음대로 만들어서 먹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라며 스스로에게 제물을 바친다는 의식을 엿보게 한다. 벤의 집에는 연쇄살인마의 전리품처럼 여성의 물건들이 수집(!)되어 있다. 종수는 해리가 찼던 것과 같은 손목시계를 벤의 집 화장실에서 발견하지만, 이 역시 직접 증거가 되기엔 부족하다. 해리와 같이 일했던 동료도 같은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종수가 벤이 해미를 살해했다고 확신하는 데 부족하지 않다. 확신하게 된 종수는 벤을 처벌한다.

종수는 벤을 칼로 찌르고 그의 포르쉐와 함께 불태운다. 종수가 불태운 것은 벤의 시신과 포르쉐뿐은 아니다. 종수는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서 포르쉐 안으로 던져넣는다. 벤과 포르쉐와 종수의 낡은 옷은 모두 불타오른다. 이것은 마치 어떤 의식과 같은 것이다. 태운다는 것은 소멸이고 제거다. 하지만 소멸과 제거는 종료가 아니라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되었음을 상징한다. 태운다는 것은 복잡한 메타포다. 영화의 제목인 '버닝'(burning)이 다의적인 것처럼. 'burning'은 '불타는', '갈망하는', '화급한'이란 뜻이다.

특별히 하는 일 없는 백수이지만 부촌의 빌라에 살고 포르쉐를 타며, 일상이 지루한 벤의 상류층 삶이란, 우리의 세속화된 욕망이다. '벤'의 존재는 오늘 한국사회의 'burning desire'다. 돈은 물신화된지 오래이고, 이러한 지적 앞에서 누구도 어떤 도덕적 안타까움이나 불편함조차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세습된 신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벤'을 갈망하지만(burning), 아무나 '벤'이 될 수는 없다.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모두가 '벤'이 되는 세상이 과연 아름다울 것인가. 우리가 좀더 인간의 얼굴을 하고, 세상이 좀더 평등하고 정의로워지기 위해서 계급사회는 타파해야할 대상이지 갈망할 일은 아니다. '벤'을 갈망하면서(burnig) 동시에 '벤'을 불태워야(burning)한다. 갈망의 대상이 곧 타파의 대상. 세상은 이렇게 부조리하고 모호하다.

종수가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서 불태운 행동은 해미의 탈의와 비교된다. 해미는 술과 대마초에 취해 윗옷을 벗어던지고 아름다운 석양 앞에서 춤을 춘다. 얼핏 자유로운 몸짓으로 보이지만, 환각에 따른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환각이란 고통스런 현실을 잠시 도피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지,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일과는 무관하므로. 벤을 죽이고 자신의 옷을 모두 벗어서 함께 불태운 종수가 현실에 대한 분노와 직접 행동을 보여줬다면, 해미의 환각에 취한 탈의와 춤은 고통스러운 현실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벤은 환각에 취한 해미를 비웃듯이 구경(!)하고, 종수는 해미에게 '창녀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말한다.

체계에 대한 의심과 불만은 가득하지만, 체계가 틀려먹었다는 확신은 없는 젊은이들. 확신이 없어서일까. 철저히 파편화된 개인으로 세상을 성토하긴 해도, 체계에 집단으로 저항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낡은 체계, 잘못된 체계, 부조리한 체계를 불태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던 소심함과 무기력함마저 불태우고, 종수는 다시 태어난 것인가? 아니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새로운 세상은 오는 것인가? 이 역시 모호하다. 알몸인 종수가 운전하는 트럭 앞유리창은 뿌옇다. 트럭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선명하게 앞을 보여주지 않는다. 체계를 불태운다고 해서 새 세상이 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체계를 불태우지 않고서는 새 세상은 없다.

'버닝'은 어려운 영화인 듯 하지만, 불친절하지는 않다. 오히려 생각밖으로 친절한 설명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버닝'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모호하게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보여주려는 것이 모호한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 영화가 모호하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모호한 것들이 모호하다는 생각을 잊어버리면 된다. 그러면 메타포가 보이고, 진짜 재미있는 영화를 볼 수 있다. 해미의 '귤'처럼. 물론 나에게는 10번쯤 봐야 갖가지 메타포와 그것들의 연결을 추론해볼 수 있을 것 같긴 하다만.

종수의 아버지가 스크린에 등장했을 때 좀 놀랐다. 최승호 사장과 너무 닮았네 했는데, 알고보니 정말 최승호 MBC 사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