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족 : 불완전하니까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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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족 : 불완전하니까 가족이다

*아래 글에는 영화 <어느 가족>의 주요 줄거리와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은 2018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으로 조금은 유명해졌다. 더 유명해지기 전에 봐야지 하고 광주극장 예매. 조금만 움직여도 이마에 땀이 나서 숨만 겨우 쉬면서 영화를 봤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고, 참으로 열악한 환경이지만 그래도 아직 살아남아 있어서 고마운 광주극장.

<어느 가족>은 줍고 주워지는 관계로 이뤄진 가족을 보여준다. '줍는 행위'와 '훔치는 행위'는 얼마나 같고 또 얼마나 다른가에 대하여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면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먼저 버려진 사람들로 구성된 이 가족을 소개해보자.

할머니 하츠에 : 바람난 남편으로부터 버림 받았지만, 그 남편의 죽음 덕분에 연금을 받고 낡은 집에서 핏줄인 아닌 가족 5명과 함께 산다.

아빠 오사무 : 도둑질이 본업이고 일용직 노동자가 부업인 것 같은 남자.

엄마 노부요 : 폭력을 일삼는 남편을 오사무와 함께 죽이고 도망친 여자. (정당방위를 인정받은 것으로 나온다)

처제 아키 : 가출해서 '가슴을 흔드는'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아가씨.

아들 쇼타 : 도박에 빠진 친부모의 차에 방치되어 있다가 오사무에게 '구조'되어, 오사무와 도둑질 콤비를 이루는 소년.

여동생 유리 : '낳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는 친엄마와 내연남의 폭력과 학대에 노출된 어린 소녀.


하츠에는 바람난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지만, 생면부지의 5명을 자신의 집에 들여 살게 한다. 오사무와 노부요는 주차장에 방치된 쇼타를 데려와 키우고, 폭력과 학대를 당하는 유리를 친엄마에게 돌려보내지 않기로 한다. 베란다에서 쪼그려 앉아 있는 유리에게 저녁밥만 먹이고 돌려보내려 했지만, 집밖으로 흘러나오는 친엄마와 내연남의 거친 싸움 소리에 노부요는 유리를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온다. 노부요는 오사무에게 '감금을 한 것도 아니고 몸값을 요구한 것도 아니니 유괴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모두 착한 사람처럼 보인다. 생면부지의 버려진 사람을 거두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좀도둑질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충당하고 가난하며, 정상적인 일상을 사는 것도 어려워 보이는 사람들이지만, 딱히 불행해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얼핏 가족처럼 보이기까지 하니 꽤 낭만적인 모습으로 비친다. 이들은 줍고 주워지는 관계를 통해서 가족이 되었다. 혈연 가족의 맹목성에서 폭력을 감지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가족>을 보고 낭만적이라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끼리 줍고 주워지는 관계를 통해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는 낭만을 보여주고, 혈연만이 가족의 근거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같은 영화다. 이들의 '줍는 행위'를 이타적인 것으로 본다면 '좀도둑 가족'(일본어 원제를 번역하면 이렇다고)의 탄생은 평범하게 따뜻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친부모와 자식이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희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자식을 방치하는 부모를 욕하게 하고,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 자식을 손가락질 하게 만든다. 그리고 혈연도 아닌, 입양 등을 통해 아이를 키우는 부모를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버려진 것에 애정을 주는 행위가 더 어렵고 가치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피붙이도 아닌데 어떻게!'라는 게 보통의 생각이다. 친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키우는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일은 없지만,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가 키우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추정해버린다.

하지만 '줍는 행위'가 항상 이타적일까? 이기적인 필요에 의해서도 '줍는 행위'는 가능하다. '좀도둑 가족'은 서로 함께 있는 것이 각자의 필요이다. 오사무가 어린 쇼타와 함께 좀도둑질을 하는 것은 공동의 목적을 위한 협업이다. 물론 혈연이 아닌 사람들끼리 한집에서 가족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배경에는 사랑과 유대감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공동 생활에는 물질이 필요하다. 물질을 구입하는 데에는 돈이 필요하다. 오사무는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지만 정작 생활에 필요한 물품은 쇼타와 좀도둑질 협업(?)으로 마련한다. 노부요는 세탁소에서 일하면서 세탁할 옷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물건을 훔친다. 아키는 남성들에게 '가슴을 흔드는' 행위를 보여주고 돈을 번다. 무항산 무항심이다. 돈은 절대적이지 않지만 필수적이다.


오사무는 쇼타에게 가르쳐줄 게 도둑질 밖에 없다고 했지만, 어쩌면 필요해서 가르친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가족의 생활에 돈과 물질은 필요하니까. 이것은 어른의 입장이다. 아직 어린 쇼타에게 자신의 도둑질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여동생' 유리까지 도둑질을 배우는 것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오사무는 유리도 가족이 되었으니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사무는 도둑질에 대하여 '주인이 없는 물건을 가져오는 것이니까 줍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한다. 사실 틀린 말이다. 가게에 진열된 물건은 판매되지 않았으니 가게 주인의 것이지 주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쇼타에게 도둑질은 주인 없는 물건을 줍는 것이 아니라 훔치는 것이다. 이것은 나쁜 일이다. 자신은 어쩔 수 없더라도 어린 유리에게 그러면 안되는 일이다. 새로운 가족의 탄생이라는 낭만을 깨는 것 역시 돈이다. 좀도둑 가족의 물질적 기반이 되었던 하츠에 할머니의 연금. 하츠에 할머니의 죽음으로 가족은 위기를 맞는다. 결국 좀도둑 가족의 위기는 쇼타가 물건을 훔치고 일부러 잡힘으로써 파국으로 치닫는다.

바닷가에서 가족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좀도둑 가족은 하츠에 할머니의 죽음을 시작으로 돈이라는 현실 앞에 다시 노출된다. 결국 쇼타가 의도적으로 경찰에 잡힘으로써 이들의 '가짜 가족'은 범죄가 되어 처벌을 받게 된다. 모든 것을 혼자 한 것으로 꾸며 노부요는 감옥에 가고, 쇼타는 아동보호소로, 유리는 친엄마에게 돌아가고, 오사무는 혼자 남는다. 이렇게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가짜 가족'은 해체되어 사회가 지정한 자리로 돌아간다.

취조를 받던 노부요는 경찰(이케와키 치즈루의 갑작스런 등장에 들리지 않게 탄성을!)에게 "낳으면 다 엄마가 되는 건가요?"라고 묻는다. 경찰은 "낳지 않으면 엄마가 될 수 없죠"라고 말한다. 경찰은 노부요에게 아이들이 뭐라고 불렀냐고 묻는데, 노부요는 한참동안 머리를 쓸어 넘기고 눈물을 닦다가 어렵게 입을 연다. "글쎄요. 뭐라고 불렀을까요?" 영화 내내 쇼타와 유리는 노부요나 오사무에게 엄마, 아빠라고 부른 적이 없다.

그들은 가족처럼 지냈지만, 가족의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이 가족이 아니라는 사실의 증거로 쓰이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족이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손녀의 발이 차다면서 고민이 있느냐고 묻는 할머니, 일하러 나가기 싫다는 남편을 무표정하고 단호하게 일터로 떠미는 아내, 더운 여름 국수를 먹다가 서로에 끌려 갑작스런 섹스를 하는 부부, 여동생의 도둑질이 못내 신경 쓰이는 오빠. 흔한 가족의 모습이다. 이들에게 혈연은 없어도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다. 가족이 되는 데 더 필요한 것이 있을까.

내세울 것 없지만 어른들은 일을 하고 좀도둑질을 하며 저녁이 되면 허름한 집에 모여서 밥을 먹는다. 각자 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한집에 모인다는 외형은 가족의 기본이다. 식구는 가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사전에서 식구의 뜻은 '집안에서 같이 살면서 끼니를 함께 먹는 사람'으로 나온다. 혈연은 식구라는 단어의 뜻풀이에 등장하지 않는다.

가족이 항상 안정적이고 따뜻한 모습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집착하기도 하고, 비정하기도 하며, 한없이 비겁해지기도 한다.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져 멋대로 벗어날 수도 없다. 가족은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기도 하고, 가장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 가족은 혈연이라고 해서 서로에게 맹목적일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혈연이 아닌 가족이라고 해서 신뢰와 유대감이 덜 하다거나 사랑이 아니라고 할 필요도 없다.


<어느 가족>은 버려진 사람들이 모인 가족의 낭만성이나 휴머니티에 그치지 않는다. 혈연이든 생면부지의 남이든 가족은 가족이다. 가족은 나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다. 당연히 규칙이 있고 의무가 따른다. 그리고 공동생활을 해결하기 위한 물질적 기반도 필요하다. 가족은 무조건적인 내 편이 되기도 하고, 남보다 못한 타인이 되기도 한다.

유리를 낳은 엄마는 '낳고 싶지 않았다'고 소리 지르고 '예쁜 옷을 사준다'는 말로 어린 유리를 유인해 학대한다. 일면식도 없던 노부야는 딸에게 관심은커녕 학대를 일삼는 친엄마에게 유리를 보내지 않기로 하고, TV에 유리의 실종 뉴스가 나오자 유리의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주고 '린'이라는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가족이 된다. 친엄마는 타인보다 못하고, 타인은 친엄마보다 낫다. 가족을 가족답게 하는 것은 혈연이라는 맹목적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위하는 사랑이라는 것. 혈연과 사랑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좋은 것인지 구분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우열을 따지거나 어느 하나만을 취사선택할 필요도 없다.

가족은 사랑만으로 유지될 수는 없다. 가족을 유지하는 데에는 돈과 물질이 들어간다. <어느 가족>이 단순히 따뜻한 드라마로 멈추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점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혈연이든 주워진 인연이든 가족은 한없이 낭만적인 것도 아니고 한없이 비극적인 것도 아니라는 평범한 사실. 영화가 사계절을 담고 있는 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다. 춥고 덥고 시원하고 따뜻한 계절은 어쩌면 삶의 희노애락을 담고 있고 가족도 마찬가지일테니까.

하츠에 할머니와 아키의 대화는 혈연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관계를 보여준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무모한 기대를 하지 않는 것. 아키는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남자 앞에서 '가슴을 흔드는' 행위로 돈을 번다. 요즘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는 하츠에 할머니에게 자신의 직업을 밝게 웃으며 이야기 한다. 하츠에 할머니도 웃으면서 가슴을 흔드는 동작을 따라 한다. 밝은 표정으로 집에 들어오는 아키에게 하츠에 할머니는 기분 좋은 일이 있었느냐고 묻고, 아키는 유흥업소에서 일하다가 만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말한다. 혈연인 할머니와 손녀였다면 가능했을까. 혈연이 아니기 때문에 맹목적인 기대나 집착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바닷가로 떠난 가족 소풍에서 하츠에 할머니는 "피가 섞이지 않아서 쓸데 없는 기대를 안해도 되니 좋다"고 말한다.

버려져서 누군가에게 주워진다는 것은 결국 선택받지 못해서 선택당하는 일과 같다. 출생을 선택할 수 없듯이 주워지는 일도 선택할 수 없다. 결국 둘은 선택권이 없는 피동이라는 면에서 닮았다. 다만 출생으로 인한 가족은 운명처럼 절대적으로 받아들이고, 줍거나 주워져서 이뤄진 가족은 마음만 먹으면 해체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할 뿐이다.

누구나 완벽할 수 없듯이 완벽한 가족은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완벽한 아빠, 완벽한 엄마, 완벽한 아들딸은 없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고 불안한 존재일 뿐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쓸데 없는 기대'를 하는 것보다 각자 불완전한 개인임을 받아들이고 서로 간섭이 아닌 보완하려 한다면 가족은 조금 더 가족적이지 않을까. 혈연이든 줍고 주워진 가족이든 상관없이. 피는 물보다 진하지만, 그렇다고 물 없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그것이 피든 물이든 우리가 살아가는 데 모두 소중한 것이다.

알제리 민족해방투쟁을 다룬 영화 <알제리 전투>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혁명은 성공하기도 어렵지만,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더 어렵다"

사랑과 연애, 결혼, 가족은 이루기도 어렵지만,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한국 영화 <가족의 탄생>, 2006년 개봉이니 12년 전 영화다. 같은 해 <메종 드 히미코>와 2005년 영화 <다섯은 너무 많아>와 함께 나에게 '가족'이라는 화두를 던져주었다. 우연이겠지만 이런 영화가 3편이나 비슷한 시기에 내 마음에 꽂혔다. 5년 만에 누나(미라, 문소리)의 집에 찾아온 동생(형철, 엄태웅), 그리고 동생이 데리고 들어온 20살 연상의 여자(무신, 고두심), 얼마 후 무신의 전 남편과 다른 여자 사이의 어린 딸(채현)이 혼자 찾아오고 한 지붕 아래 살게 된다. 이런 저런 에피소드가 지나가고 세월이 흐른 후 피 한방울 안 섞인 미라와 무신, 채현은 가족이 되어 한집에서 살고 있다. 세 여자는 채현(정유미)의 남자친구(경석, 봉태규)와 집에서 식사를 한다. 식사 중 채현은 '엄마들 나 밥 좀'이라고 말한다. 채현에게는 엄마가 둘이라서 '엄마'가 아니라 '엄마들'이다. 물론 낳아준 엄마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일한 혈연관계인 미라의 동생 형철은 다시 임신한 여자를 데리고 미라의 집을 찾아온다. 형철은 늘 '내가 다 해결하겠다'고 큰 소리 치면서 정작 해결은커녕 사고만 치고 뒷수습은 늘 누나에게 미루는 골치덩어리 동생이다. 미라와 무신, 채현, 경석 피 한방울 안 섞인 이들이 한집에서 김장을 하다가 형철과 임산부의 등장에 당황한다. 미라는 결심을 한 듯 (피붙이임에도 불구하고) 외부인들을 대문 밖으로 조용히 데리고 나가고 문을 닫아버린다. 일본 영화 <어느 가족>을 예매해놓고 <가족의 탄생>을 다시 보았다. 마치 사전 예습을 하듯.


가족적 삶

가족 너머를 상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