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주식

    삼성생명 공모주 청약금이 '사상 최대'라고 언론회사들이 삼성을 기사로 빨아주신다. '공모주 청약'이라는 그럴싸 한 말로 둔갑시켰지만, 쉽게 말해 돈 놓고 돈 먹기 하는 거잖아. 이게 다 돈 놓는 자 따로 있고, 돈 먹는 자 따로 있는 게임이라는 건 희극이고. 이런 불멸의 법칙을 알면서도 '자신만은 예외', 또는 '이번만은!'이라고 믿게 만드는 돈의 사악한 마법에 걸려들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게 비극이고. 주식으로 돈 벌었다(그러니까 다른 누군가의 피눈물에 기반한 불로소득!)는 말을 자랑스럽게 할 수 있고, 그 사람을 부러워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건 참극이다. 주가가 계속 오르려면 기업은 계속 이윤을 올려야 한다. 작년보다 올해 이윤을 더 올리지 않으면 주가는 오르기 어렵다. 이윤을 내지 않는 회사에..

    아톰의 교훈

    어렸을 적, 그러니까 1980년대 초반 무렵이나 됐을까.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일이다. 당시 우리 세대들 사이에서 아톰은 요즘 말로 하면 문화아이콘이었다. 웬만하게 사는 집 애들은 모두 아톰 장난감을 하나씩 갖고 있었다. 비교적 웬만하지 못했던 우리 집 살림 때문에 나는 녀석들을 부러워하기만 했다. 곱게 말해 부러웠지, radical하게 표현하자면 난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아톰 장난감을 갖고 싶은 욕망을 억압당해야 했다. 난 사실 이게 매우 불만이었다. 왜 저 녀석들은(특히 나보다 공부도 못하는 녀석들 말이다) 아톰 장난감을 가질 수 있는데 난 그럴 수 없을까? 물론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어린 아이의 정치의식으로는 내 욕망을 거세한 자본주의의 실체를 알아챌 순 없었다. 하지만 불만이 있으면..

    무엇을 유보할 것인가?

    "살고 싶은 삶을 언제까지 더 유보하면 홀가분하게 밥그릇으로부터 자유로워질까?" -소설 中- 자본주의적 생산 시스템은 행위와 행위결과를 분리시키고, 주체와 객체를 분리시킨다. '살고 싶은 삶'은 언제나 '밥그릇'과 분리된다. 단순히 괴리되는 것이 아니라 심각하게 충돌하고 갈등한다. 대부분 '밥그릇'이 아닌 '살고 싶은 삶'을 유보하지만, '밥그릇'에 대한 삶의 종속은 점점 강화된다. 자본이 노동자의 '밥그릇'을 강력히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자본은 노동자의 '밥그릇'에 의존한다. 우리가 '밥그릇'을 유보하고 '살고 싶은 삶'을 선택하는 순간, 긴장하고 분주해지는 쪽은 자본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유의 전복만큼 현실은 술술 풀리지 않는 법. 이게 문제라는 거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