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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극히 실용적인 지침들

걸으면서 철학하는 사람들 <장미와 주판>에서 김영민 교수의 글을 가져왔습니다.


산책, 극히 실용적인 지침들

1. 가급적 도심(都心)을 피한다. 이쁜 공원길이라도, 차도가 지척이거나 '파워워킹족'들이 좀비처럼 흘러다니면 하등이다. 시외나 심지어 산이라도 나무가 없거나 적은 곳은 썩 좋지 않다. (따라서, 해변을 걷는 일에도 나름의 운치가 깊지만 그것은 산책의 본령이 아니다. 요컨대, 짠물이든 민물이든, 물이 너무 많은 곳에서는 산책도 수행도 대화도 어렵다.)
그리고, 숲과 산이란 무릇 '계단이 없는 곳'이니, 비록 밀림 속이라도 계단식의 길을 오르는 짓은 산책/산행의 이치에 어긋난다. 조금 더 까탈을 부리자면, 원예종 꽃들이 배우처럼 방실거리는 베르사이유 정원같은 곳도 아니다. 제 맘대로 피는 꽃들의 재롱을 어쩔 수 없으나, 묵직한 거목의 운치를 배울 수 있는 길이면 상등이다. 산책은 무엇보다도 '우연'의 깊이를 배우는 곳이기 때문이다.

2. 시간을 꼬집어 고집할 이유는 없다; 나는 편의상 대개 해질녘을 택하는데, 주로 외식(外食)으로 일식(一食)하는 편이라, 천변이나 산야를 따라 1시간 남짓을 걷고 적당한 식당을 찾아든다. 허소(虛疎)의 미학과 부재의 존재론을 살피는 산책이라면, 해뜨는 시각이 아니라 해지는 시각을 택하는 것은 지당하다. 이를테면, '욕심을 버리고 의욕을 키운다'는 상념은 석양의 천변을 따라 자생한 것이다. 지고, 흐르는 세상을 보면서 그 누가 겸허해지지 않겠는가?
드물게는 색다른 곳을 찾아 2시간, 혹은 그 이상을 걷기도 하지만, 산책이란 모름지기 몸이 주체가 되는 노릇이니 몸이 시키는대로 따를 일이다.

3. 산책은 술보다는 차(茶)와 같아, 혼자 걷는 게 좋다. 물론, 혼자 걸으면서 '생각'을 하라는 게 아니다. 혼자 하는 생각은 대개 비생산적일 뿐 아니라 종종 자익적(自溺的)이다. '공부'하지 않는 이들에게 오히려 '생각'이 많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잡념 속에 천 년을 빠져 있어도 구원은 없다. 산책의 요체는 오히려 생각과 의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라는 거울의 바깥으로 몸을 끄-을-며 외출한다.
동무들과 나누는 산책의 기쁨도 결코 적지 않다. 하늘과 나무와 바람에다가, 다정하고 서늘한 대화까지 섞인다면 인생의 천국을 따로 구할 노릇이 아니다. 하지만, 역시 요체는 중용인데, 말이 걸음을 죽여도 곤란하고, 걸음이 말을 놓쳐도 안된다. 다변(多辯)인 자는 말수를 줄여야 하고, 눌변인 자는 걸음에 의지해서 입을 벌릴 수 있다.

4. 산책은 등산과 무관하며, 따라서 등산객의 구색은 별무소용이다. 등짐이나 지팡이, 모자나 선글라스 등은 없애고, 가능하면 몸을 죄는 옷이나 신발은 피한다. 시계를 포함한 장신구 일체도 몸에 걸치지 않는다. 산책은 우선 '몸을 숨기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체의 이완과 수축, 흐름과 매듭을 제대로 느끼는 일은 산책을 '이동'과 차별화하는 중요한 지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염신관(念身觀)은 몸을 보고 느끼는 수행법인데, 산책과 같은 경행(經行)으로도 염신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