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믿는 구석

자유롭게 남다른 선택을 하며 사는 사람들을 나는 좋아한다. 사회 또는 가족이 정해주거나 강요하는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자기의 삶'을 사는 사람들.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고생(?)을 자처하면서도 불행해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다른 선택은 '고생'과 갈등을 운명처럼 업고 다니기 마련이다. '정상적인' 루트를 벗어난 삶에는 거의 궁핍과 가난이 따라 붙는다. 물론 이것은 개인의 탓이라기보다는 사회적 현상에 가깝다. 사회는 남다르게 사는 이들을 용납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모든 실존적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에 떳떳할 수 있다는 것은 보통의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여기까지는 그럴 듯 하고 올바르기까지 한 스토리다.

그런데, 알고 보니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나에게 실망스러운 경험이다.
영화에서나, 소설에서나, 내 주변의 실존인물이거나.
애석하게도(?) 그들의 자유로운 선택의 한편에는 감춰진(최소한 말해지지 않은) 배경이 있다. 나는 그것을 '믿는 구석'이라고 부른다. '믿는 구석'은 (부모의) 경제 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과 같은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혜린은 열혈 운동권 대학생이다. 그녀는 부잣집 외동딸이다. 데모하다 경찰에 끌려가더라도 '빽'을 써서 빼낼 수 있는 힘이 있는 집안이다. 물론 극중 혜린은 그러한 사실을 견딜 수 없이 싫어한다.
하지만 그 시대에 누군가는 혜린의 집안 내력을 '믿는 구석'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남들은 '독재타도'라는 역사적 사명감에 불타 데모할 때, 가난한 집안을 일으켜야 하는 가족적 사명감에 묵묵히 도서관으로 향해야 했던 대학생에게는 '자유로운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노는 축에 끼고 종종 사고도 치는 학생들에게는 대개 '믿는 구석'이 있었다. '노는 아이들' 중에는 꼭 공부도 잘 하는 학생이 있다. 알고 보니 그의 아버지는 교수.
놀기는커녕 마음 편히 공부만 하기도 어려운 형편의 학생들은 어찌되었든 '좋은 대학'에 가야 했기에 쥐죽은 듯 공부만 할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다. '믿는 구석'이 없다면, '자유로운 선택'은 꿈도 꾸지 말고 정해진 루트에서 죽어라 노력해야 한다. 물론 노력한다고 해서 성공을 보장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빌어먹을!

우석훈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지인들에게, 무조건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대세를 따르지 말고, 특히 광고에서 시키는 것 혹은 종이신문에서 시키는 것은 무조건 하지 말라가 되지요. 제 경우는, 남들 하는 것은 10대 때부터, 무조건 안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광고가 시키는 것은 무조건 안할 생각입니다.
최소한의 자기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계산해보면 그 경우가 성공의 확률도 높습니다. 경쟁 조건과 유행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합쳐보면, 그렇게 계산이 나옵니다.

그의 말에 적극 공감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믿는 구석'이 없는 사람에게, 무조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제도교육을 거부하고 대안학교를 선택하는 아이들의 부모들은 대부분 고학력에 중산층 이상이다. 학생이 스스로 대안학교를 선택하겠다고 하더라도 부모가 '트인' 사람들이 아니라면 아이의 선택은 포기될 수밖에 없다. 부모의 고학력과 경제적 부는 서울대 가는 데에만 필요한 게 아니라, 소위 '대안적 삶'을 선택하는 데에도 나름 영향을 미친다. 못 배우고 가난한 부모에게는 무조건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는 자식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자유로운 선택'을 위해서는 '믿는 구석'이 있어야 한다. 특히 꿈마저 세습시키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것이 요즘 나의 경험적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