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희망

희망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희망은 마냥 이야기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절망 속에도 희망은 있다'는 식으로 쉽게 긍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지독한 절망 상태라면 그것은 절망이지 '희망은 있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쇠로 만든 방'에 대한 루쉰의 이야기가 있다.
90년대 후반 무렵, 나는 그 이야기가 희망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런데 10여년이 지나서야 제대로 이해한 것 같다.
루쉰은 희망이 아니라 오히려 절망을 말했다. 분명히 그랬다.

"가령 말이야. 쇠로 만든 방이 있다 치자구. 창문은 하나도 없고 부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야.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는데, 머지 않아 모두 숨이 막혀 죽을 거야. 하지만 혼수 상태에서 죽어가는 거니까 죽음의 비애는 조금도 느끼지 않지. 지금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서 비교적 정신이 있는 사람 몇명을 깨운다면 말야. 그 불행한 소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임종의 고통을 주게 될텐데.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겠어?"

"하지만 몇 사람이 일어난 이상, 그 쇠로 만든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
-루쉰의 소설집 <외침> 서문에서-

자신에게 글쓰기를 권하러 찾아온 친구에게 루쉰은 당시의 시대적 절망을 '쇠로 만든 방'으로 비유하여 말한다. 친구는 일말의 희망을 말하지만, 루쉰에게는 절망이 더욱 중요했다. 루쉰에게 희망이란 장밋빛도 아니고, 절망을 이겨내는 숭고한 정신능력과 같은 것도 아니었다.
루쉰은 희망을 '땅 위에 난 길'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희망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는데,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은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루쉰은 희망을 '허망'이라고 하면서, 값싸고 쉬운 희망을 단호하게 배격하려고 했던 것이다.
희망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절망의 현실을 정확하게 마주하는 일이다. 어두움과 패배와 좌절, 상처 따위들에게 아낌없이 정직해지는 일이다.

내가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다면, 그 이유는 거기에 희망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 아니다.
단지 걸으면서 희망이 생겨날 수도 있기 때문일 뿐이다.

루쉰의 말처럼 희망이란 '미래에 속하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