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주주공 여행
diary

염주주공 여행

0123

엄마가 그랬다. 오늘 우리집에서 꾸레아 모임을 한다고. 단원들이 우리집에 와서 점심을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 밖에서 사먹겠다고 했다.
독서실 근처 김밥나라에 가서 라면과 김밥을 사먹었다. 배가 두둑한 채 바로 책상 앞에 앉아있기 뭐해서 산책을 하기로 했다. 여느 때처럼 월드컵경기장 쪽으로 갈까 하다가 염주주공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 전부터 동경(?)해오던 곳. 어렸을 적 운암주공아파트에서 살았던 기억 때문일까. 아파트의 생김새도 비슷하고 무엇보다 아파트단지 전체가 풍기는 분위기가 아련한 추억처럼 좋은 느낌이다.

내가 지금 얹혀 살고 있는 아버지의 아파트도 15년쯤 된 오래된 아파트인데, 염주주공은 지은 지 24년이나 되었다 한다.
염주주공의 가장 큰 매력은 단장되지 않은 자연스러움과 작은 규모가 주는 아늑함이다. 요즘 최신식 고층아파트들은 살기에는 편리할지 모르겠으나, 집 밖에 나오고 싶은 마음이 드는 구조는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렇다. 예를 들면 염주주공 단지 안을 걷는 것은 산책이라는 기분이 풍만하다. 그러나 고층아파트 단지 안은 그저 이동해야 하는 통로 같은 기분이다. 요즘 아파트 단지들이 그리 넓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또 염주주공은 오래된 수목들이 무성해서 숲 속에 아파트가 수줍게 들어가 있는 형상이다. 가보면 알겠지만 웬만한 나무들은 5층 아파트보다 더 높게 자랐다. 요즘 고층아파트단지는 삭막한 사무실 안에 화분 몇 개 들여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여하간 나에겐 작은 여행이었다. 거의 5층 아파트들이고, 길도 좁고 구불구불하고 그렇다. 놀이터의 미끄럼틀은 여기저기 페인트칠이 벗겨져 있고, 아이들은 더이상 흙놀이를 하지 않는지 놀이터의 모래밭에는 잡초가 자라고 있다. 그래도 돈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오랜 세월의 흔적들을 걸음걸음마다 느낀다. 관리되지 않은 나무와 풀들은 오히려 풍성함을 준다. 제멋대로 뻗은 나무들, 계획된 조경은 거의 실행되지 않은 것 같은. 인공적이지 않아서 좋다. 20년이 넘도록 피고 지고 했으리라. 오래된 것은 새 것보다 편안하다.

터벅터벅 걷는데, 압력밥솥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오랜만에 듣는다.

운암주공아파트에 살 때 엄마는 항상 압력밥솥에 밥을 했다. 당시 한국의 거의 모든 주부들이 그랬던 것처럼. 누구의 집에나 하나씩은 꼭 있는 압력밥솥. 요즘에는 거의 전기밥통이 알아서 다 해버린다.
내가 어렸을 적, 엄마는 가스렌지 위에 압력밥솥을 올려놓고 잠시 밖에 나갈 일이 생기면 항상 나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압력밥솥의 추가 돌아가고 푸카푸카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몇 분 후에 가스렌지 불을 끄라고.
그러나 TV에 정신이 팔려 깜빡 해버리는 일도 잦았으니, 덕분에 내가 좋아하는 '깐밥'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았을 뿐이고. 깐밥에 설탕 뿌려서 먹는 걸 되게 좋아했다.
4살 때던가, 집 앞에서 놀다가 이마가 깨지고 병원에서 몇 바늘 꿰매는 일이 있었다. 집에서 내가 눈을 떴을 때 머리맡에는 깐밥이 놓여 있었다. 아빠는 내가 깨어나면 아프다고 울까봐 내가 좋아하는 깐밥으로 달래려고 했던거다. 여하간 나는 눈을 뜨자마자 꿰맨 곳이 아픈지도 모르고 깐밥을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흠... 이러다가 한도 없겠군.

다음에는 오늘 돌아보지 못한 곳도 구석구석 가봐야겠다.
세상에는 참 돌아다녀야 할 곳이 많다. 그래서 여행하다가 죽는 게 소원인 사람도 있는 걸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