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이젠 안녕, H!

H에게

내가 너를 만나고 알게 된지 참 많은 시간이 지났다. 첫만남은 늘 그렇지. 티끌 하나 없이 순정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다는 것. 첫만남은 그렇게 숭고함마저 느껴졌지.

많은 일들이 있었어. 너와 함께 영화와 음악을 즐길 수 있었지. 졸필이나마 여기저기 글을 남기는 일도 네가 없었다면 많이 힘들어졌을거야.

그렇게 많은 일들을 너와 함께 겪어내고, 너로 인하여 내가 즐겁고, 너로 인하여 내가 울기도 했지.

그런건가봐.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들이 익숙해져. 익숙해지는 만큼 관계의 깊이도 성숙해지면 좋으련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야. 익숙함은 막연한 믿음을 잉태하지. 믿음이 막연하다는 건 무턱대고 믿어버린다고 생각하는 거야. 믿음은 실로 지극한 정성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익숙해지면 잊어버리나봐.

별 탈 없이 지내고 있으니까, 아무 문제 없이 우리 만나고 있으니까 그걸로 충분하다고 믿었나봐. 어제도 그러했듯이 오늘도 그러하면 되는 것인줄 알았나봐.

어제 밤 방의 불을 켰으니까, 오늘 밤에도 방안의 불은 당연히 켜질 거라고 믿어버리는 거지.
여하간 너는 아무런 말도 없이, 어떠한 예고도 없이 그렇게 가버렸어.

떠날 때 말이 없듯이, 너는 지금도 아무런 말을 해주지 않는구나.

너의 빈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어. 야속하다고 생각하지마. 너를 대신할 존재가 없다면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어져. 그래. 어찌보면 너는 나에게 그렇게 거대하고 깊은 존재였나봐. 이별 후의 감정을 채 추스리기도 전에 다른 존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어.

너를 잊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안해. 차곡차곡 접어두어야지. 불쑥 생각이 튀어오를 때마다 꾹꾹 눌러야지. 그러다보면, 연습하고 훈련하다 보면 이 일도 역시 익숙해지겠지.

이제 너를 보낸다.

어떻게든 붙잡으려고 했지만, 너의 변함없는 침묵에서 이제 이별임을 직감하고 말았다.

나는 다시 새로 시작한다.

이젠 안녕, Hard Disk!


구입한지 2주일 만에 손상되어버린 Hard Disk를 보내며.
덧붙여, 컴맹들이 이 글을 알아먹을지 심히 우려되는군.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