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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평화적 상상력

우리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訟事)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태복음 5장 39-40절) 라는 예수의 권고에서 '평화적 상상력'의 예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권고는 하층민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예수는 여기에서 단지 불의를 받아들이는 수동적 행위나 인내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행위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연대의식으로 부르는 데 있다. 원수를 사랑하고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말라는 예수의 권고에서 중요한 점은 주어진 조건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상황을 창출해냄으로써 폭력적인 조건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폭력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적이 아니라 동반자라는 사실을 인식시켜줄 수 있는 상황을 창출해낼 수 있는 생산적인 상상력이다. 이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공격당한 자가 '폭력에는 폭력으로'라는 폭력의 순환 고리를 분쇄하고 다른 사람을 연대의식으로 부를 수 있는 행동 양식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추구해야 할 바는 원수의 종말이 아니라 증오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Klaus Wengst, Pax Romana, 정지련 역, 『로마의 평화-예수와 초대 그리스도교의 평화인식과 경험』, 한국신학연구소, 1994, 154-158쪽 참조

공부할 때 이면지를 즐겨 쓴다. 규칙적으로 선이 인쇄돼 있는 연습장이나 노트보다는 하얀 백지가 막 쓰기에는 좋으니까. 선이 그어져 있으면 뭔가 제한받는 기분이어서 별로다. 이면지에는 내키는대로 막 휘갈겨 쓰기도 하고, 멋대로 개념도라고 그려보기도 하고, 딴에는 자원재활용한다는 폼도 잡고 해서 좋다.

그건 그렇고. 간혹 이면지 넘기다가 인쇄된 면을 슬쩍 보기도 하는데, 예전에 내가 이런 걸 인쇄해서 봤구나 하는 짧은 감흥에 젖기도 한다. 오늘은 논문 쓸 때 참고문헌으로 인쇄했던 어떤 논문의 페이지가 걸려들었다. 머리 좀 식힐 겸 몇 페이지를 읽었더니 좋은 구절들이 참 많다.

성경 한번 제대로 읽은 적 없지만, 예수의 말들은 곱씹어볼 만한 게 꽤 많은 것 같다. 더불어 참 많이도 왜곡되어 알려진 내용도 많다고 생각한다. 특히 예수의 혁명적 언설이 역으로 지배이데올로기로 활용되고 있는 현실은 참 아이러니하다. 비슷한 측면에서 소크라테스도 좀 억울할 것 같다. 악법에 목숨으로 저항했더니,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악법도 법이니까 일단 지켜라'는 해괴한 논리로 인민들을 세뇌시키는 데 활용되었으니까.
바리새인들을 향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독설을 퍼붓는 예수의 모습이 한국 교회에서 복원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