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난을 아는 교사

2002년 11월 한겨레 공채 낙방 직후, 어느 초등학교에서 영어보조교사(영어실력과는 아무 상관 없다)로 한달간 알바를 한 적이 있다. 영어교과실이 따로 있어서 4명의 아줌마 교사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거짓말 안 보태고 하루에 한번 이상 택배가 왔다. 수업 없는 교사들은 교과실에서 인터넷 쇼핑을 하고, 쇼핑에 대한 정보를 나누었으며, 시댁 식구들 '뒷다마'를 까댔다. 물론 가끔 교재연구를 하거나 시험문제를 출제하는 본업도 잊지는 않았다. 이게 완전히 나쁜 짓이라는 생각은 아니다. 오히려 근무시간에 인터넷쇼핑도 하고 이런저런 사담도 나누는 건 직장생활의 재미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교사라고 해서 엄격하게 근무수칙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사기업에서도 좀 눈치껏 농땡이 피우는 직장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는 게 나의 소신이다. 물론 본업에 지장을 줄 정도로 본말이 전도되어서는 곤란하지만.
이건 이 글의 주제는 아니고.

수업 들어간 교사들의 택배를 열심히 대신 받아주던 어느 날이었다.
쉬는 시간에 한 교사가 남자아이를 데리고 들어오더니 무언가 이유를 캐묻는 거였다. 대충 사태 파악을 해보니 한 학년 전체가 수학여행인가 체험학습인가를 가는데 그 아이가 안간다는 모양이다. 그래서 교사가 아이에게 왜 안 가려고 하느냐고 '추궁'하고 있는 거였다. 친구들 다 가는데 너만 빠지면 되겠느냐 하면서 살살 달래더니, 아이가 입을 굳게 다물고 뻣뻣하게 서 있으니까 다그치기 시작했다. 안 가는 건 좋은데 이유는 말해야지 그렇게 한마디도 안 하고 있으면 되느냐고 아이를 몰아세우더라. 옆에서 보고 있던 나는 대번에 아이가 안 가는 이유를 알겠던데.

낼 돈이 없거나 부모가 못가게 하는 거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옷차림도 꾀죄죄한 걸 봐서 가난한 집 아이라는 걸 딱 알겠던데. 십중팔구 집에서 돈 낼 형편이 안되니까 못가는 거다. 저렇게 한마디도 안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다면 '100프로'다. 그 나이에 '집에서 돈 없다고 가지 말래요'라는 말을 어떻게 하겠나. 
그 교사는 왜 저리 아이를 다그치고 있는지 이해가 안됐다.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건지, 알고도 아이 입으로 직접 이유를 말하게 하려고 하는 건지. 전자라면 가난을 잘 모르는 교사이고, 후자라면 잔인한 교사라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별로 좋은 교사는 못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유를 말하라고 다그치는 교사 앞에서 남자 아이는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당황한 교사는 또 왜 우냐고, 뭘 잘했다고 우냐고 다그쳤다. 헐~ 좀 미안했던지 교사는 아이에게 울지 마라며 교실로 돌려보냈고 사태는 일단락.

흔히 교사의 기본은 잘 가르치는 거라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만, 좋은 교사는 가난을 아는 사람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교수능력이 뛰어난 것도 좋은 교사의 덕목 중 하나라는 건 틀림 없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난을 알아야 한다는 거다. 가난한 사람이 교사가 되어야 한다거나, 일부러 가난을 겪어봐야 한다는 주장까지는 아니지만. 가난을 전혀 모르는 사람보다는 가난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좋은 교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럼 가난을 안다는 건 뭘 의미하나? 복잡한 이야기가 되니까, 일단 최소치를 정해본다면, 가난한 사람의 처지와 심리를 헤아리고 배려할 줄 아는 정도? 되게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지만 그렇다.
특히 어린 학생이나, 민감한 성장기를 통과하고 있는 청소년에게 가난에 대한 심리나 태도는 폭탄 같은 거다. 일단 건드리면 터져버린다. 최대한 조심히 피해줘야 한다. 그렇다고 계속 안고 살게 둘 수도 없다. 폭탄은 제거되어야 한다. 이게 무슨 너도 부자가 될 수 있으니까 공부 열심히 하라는 개 풀 뜯어먹는 소리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세상은 노력한 만큼 보상을 해주는 착한 시스템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게 좋다고 본다. 세상은 냉혹하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지독히도 잔인한 것이 세상의 이치라는 걸 정확히 알려줘야 한다. 다만 네가 부자가 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네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많다는 걸 알려줘야지. 가난한 건 되게 안 좋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사람새끼에서 돼지새끼나 말새끼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말해줘야지.
그런데 '지금은 가난 때문에 네가 고생하지만, 나중에 성공해서 돌아보면 좋은 추억이 될 거야'라는 말은 영 내 취향이 아니라서 절대 못할 것 같다. ㅋ

음.. 또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은 쉽게 해서는 안된다. 가난한 학생에게 '네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은 많다'라는 건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가 아니라는 거다.
세상엔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다른 게 있는 사람들인 경우가 대다수다.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는 문화자본을 가진 사람들. 가난이 주어진 게 아니라,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 한겨레나 경향신문, 소위 진보적 미디어에서 가끔씩 소개되는 '대안적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가난한 학생에게 너도 저런 사람들처럼 될 수 있다라고 선뜻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주어진 가난이 창피한 사람에게 '저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잖아'라고 말하는 건 폭력이다.

주어진 건 가난 밖에 없는 사람에게는 '너도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어'라고 하는 거나, '가난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대안적 삶이 있어'라고 하는 거나 비현실적이라는 점에서 매한가지라는 게 내 생각이다.
괜한 장밋빛 꿈을 심어주기보다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하고, 최소한 주어진 현실에 패배하지 않을 정도의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돕는 게 낫지 않나 생각한다.

흠.... 뭔가 글이 뒤죽박죽이군.

어쨌거나 저쨌거나.
메가스터디의 스타강사들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휘황찬란한 교수실력을 뽐내며 교장과 학부모, 학생들의 찬양을 한 몸에 받는 교사라 하더라도,
아이들 다 있는 교실에서 공개적으로 급식지원 받을 학생을 조사하는 만행을 저지르고서도 별 잘못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교사는 무능한 교사라고 나는 감히 평가하겠다.

한 학급 30명의 학생 중 29명을 서울대에 보낼 수 있는 교사이더라도, 가난을 들키느니 차라리 밥 굶는 것을 선택하는 단 1명의 학생을 만든다면 참 곤란한 일이다.

흔히 교사는 학생들을 편애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달리 생각한다. 교사는 편애할 줄 알아야 한다. 애정과 관심을 덜 줘도 되는 학생들한테만 편애가 집중되는 것이 문제일 뿐.
교사가 학생 1인당 100 만큼의 애정을 쏟을 수 있다면, 집안 경제력도 좋고 공부도 알아서 잘 하는 학생에게 똑같이 100을 쏟을 게 아니라 70 정도만 쓰고, 나머지 30을 보태서 가난하고 공부도 포기한 학생에게 130의 애정을 쏟는 게 더 나은 거 아닐까.
문제는 편애가 아니라, 그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