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난 팬이다

communi21@gmail.com 2009. 12. 22. 23:44

나는 팬 문화를 우호적으로 보는 편이고, 팬 문화를 관찰하는 짓을 즐긴다. 그러나 누군가의 팬을 자처하지는 않는다. 딱 한명을 빼고.
그가 바로 진중권이다.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은 꽤 오래 전 일이다. 그의 행보를 주목하던 중 '이 사람 멋진데' 하고 좋아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2001년 부산대 '월장 사건'이었다.
이게 뭐냐면, 부산대 여성주의 활동을 하던 학우들이 '월장'이라는 웹진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예비역 문화를 씹는 글이 실렸고, 분개한 전국의 예비역들이 '월장'을 초토화 시켜버린, 그런 더러운 일이다. 요즘 네티즌수사대에 밉보이면 신상 털리는 게 필수가 되는 지경인데, 그 때에도 월장 여학우들의 신상이 털렸다. 핸폰 번호가 털려서, 온갖 추잡한 협박과 욕설로 융단폭격 당했다. 실제로 신변의 위험까지 느낄 정도였는데, 이 때 전국의 덜 떨어진 호전적 수컷들에게 단호히 칼을 뽑아든 이가 바로 진중권이었다.

진중권은 월장의 주장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 수컷들의 무식한 집단 다구리를 신랄하게 씹어주었다. 그 때 난 예비역 복학생이었는데, 그의 글을 남몰래(?) 읽으며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이렇게 통쾌할 수가! 그건 정의감이나 올바름 따위이기 전에 쾌락이었다. 나 자신이 예비역이었고, 예비역협의회장이라는 감투까지 썼지만(이거 강제였다!) 예비역 문화가 싫었다. 몸이 제대했으면 정신도 제대를 해야 하는데, 진중권의 지적처럼 '군을 떠나서도 정신은 여전히 군이라는 특수사회의 원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진중권의 육탄전에 힘입은 나는 월장 사건을 학과 게시판으로 옮겨와서 토론을 걸어봤다. 물론 익명의 도움을 얻어.
간단했다. 예비역들에게 군사주의 문화가 잔재하는 것은 사실이니까, 무엇이 문제이고, 이것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이야기하자고 제안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대다수는 침묵을 지키고, 몇몇은 예비역이 무슨 죄냐며 스스로 죄인으로 전락하시고, 몇몇은 '너희는 어려서 몰라'라는 식으로 개무시하고, 또 몇몇은 괜히 문제를 만들어서 화기애애한 학과 분위기를 망친다고 질타하더라.(이런 입장이 가장 악질이다) 그래 인민들은 죽어나가도 명박가카께서는 나라 분위기 좋다고 믿지. ㅋ

결국 아무 것도 모르는 모 여학우가 학과 게시판을 '분탕질'한 '싸가지 없는 후배'로 누명을 쓰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나는 더이상 게시판에 글을 남기지 않았다.

뭐 이런 계기로 나는 진중권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의 미학적인 논쟁술에 탄복하며 쾌감마저 느끼곤 했다. 그리고 팬이 되었다. 오늘 조선대에서 진중권의 강연이 있다는 첩보(?)를 접수하고, 그의 얼굴을 보러 갔다. 강연을 듣는 건 부차적인 것이고, 나는 진중권의 얼굴을 보러 갔다. 가수의 팬이 꼭 노래를 들으러 콘서트장에 가는 건 아니잖아.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러 가는 거지.
그의 얼굴을 보고, 그의 육성을 직접 듣고, 그의 친필 사인을 받고, 그와 악수와 미소를 나눴다.
이것으로 팬의 마음은 풍만하다.

내가 상상하는 지상 최대의 쇼는 명박가카와 진중권이 맞장토론을 벌이는 거다. 세상에 이런 볼거리는 없을 듯. ㅋ 물론 토론이 아니라 '쇼'가 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