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현실

*이 글은 건방지다.는 점을 미리 밝혀둠. ㅋ

요즘 세상에는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무척 드물다. 혹여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현실을 모르는 천진한 이상주의자 또는 배부른 로맨티스트' 취급을 받기 일쑤다. 대신에 '현실이 어쩌고' 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차고 넘친다. 전혀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그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갑갑하고 호락호락하지 않으며 가혹하기까지 하니까.

그런데 나는 의문이 든다. '현실이 어쩌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말 현실적인 것일까? 이들이야말로 너무 비현실적이고 가끔은 초현실적인 의식을 갖고 있는 거 아니냐 이말이다.

한국사회의 청년들은 안정된 직장을 갖기 위해 어마어마한 노력과 시간과 돈을 들인다.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스펙을 관리하거나, 도서관에서 공무원 수험서와 씨름 한다.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을 이야기 하지만, 진짜 현실은 그들 중 원하는 목표를 이루게 되는 사람은 5%나 될까 한다는 거다. 그럼 나머지 95%는? 답이 없다. 청년의 태반이 공무원이 되겠다고 나서게 만드는 사회는 끔찍하다. 엄혹한 현실은 사람들을 비현실적으로 만든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칭찬해마지 않는다는(뭔가 단단히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냐) 한국의 광기어린 교육열도 매우 비현실적인 현상이다. SKY의 입학정원은 어차피 정해져 있고, 외고나 과학고 출신 학생들의 합격률이 높고, 이들은 대부분 고소득 전문직 부모의 자식들이다.
개천에서 용 안나는 건 이미 오래된 이야기다. 이제는 개천의 물도 다 말라버렸고, 혹여 개천에서 용이 나더라도 귀족 용들의 사회에서 왕따 당한다는 말도 있다. 개천에서 난 용은 차라리 용이 되지 말았어야 한다며 자기 삶을 후회한다는 슬픈 이야기다. ㅋ
신분사회는 우리의 현실이다. 만인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심지어 법 앞에서도 그렇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신분을 상위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믿으며, 현재를 저당 잡히는 삶을 선택한다(기보다는 강제당한다).

현실이 어쩔 수 없으니까, 너무 애쓰지 말고 대충 살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가난한 자가 부자의 꿈(비현실적인 꿈)을 꾸면 불행할 수 있다는 거다. 게다가 부자의 꿈은 바람직하지도 않다. 잡히지도 않는 신기루를 좇지 말고, 자신의 가난한 현실을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말고 다른 방식의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행복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길이다. 되도 않는 공부를 한다고 아까운 청춘을 소멸시키기보다는 다른 진로를 찾는 게 더 현실적이고 행복에 가까워지는 길인 거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몰라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역시 불안하기 때문이다. 남들 다 가는 길에서 벗어난다는 불안.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남들 다 가는 길을 버려야 행복할 수 있다. 원래 행복이란 건 9번 실패하고 10번째 찾아오는 거다. 실패를 두려워하면 행복은 얻기 어렵다.

나는 '현실이 어쩌고' 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현실을 이해하려고는 하나 별로 신뢰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현실이란 건, 대개 그들 스스로가 만든 것이거나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현실'이라는 보호막을 치고, 자신의 삶을 변명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살다보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란 건 부지기수로 맞닥뜨리기 마련이다. 이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에 대응하는 방식은 다르다. '현실이 어쩌고' 하는 사람들은 현실을 적응해야 할 환경으로 받아들인다. 반면에 자신이 행복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그것을 넘어서려는 사람들도 있다.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거나 다른 길을 만들어내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현실과 불화하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어떠한 삶이 더 행복하고 좋은 거냐 하는 건 섣불리 말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후자의 사람들이 행복한 삶에 근접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건방지게도. ㅋ 주변 사람들을 보면 잠정적으로 그런 결론이 가능하다.

'현실이 어쩌고' 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조건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항상 남들을 의식하고, 타인의 시선을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재단하려고 한다. 남들 다 하는대로 해야 자기가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현실 따위는 개나 줘버려'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매우 잘 안다. 어떻게 하면 자기가 즐겁고, 어떻게 하면 자기가 괴로운지 잘 안다. 이들은 변화무쌍한 현실에서도 일관되게 자신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자들인 경우가 많다. 심리학에서 증명되었듯이 웃음은 바이러스처럼 전염된다. 행복한 사람 옆에 있으면 자기도 행복해진다. 자신이 행복해야 남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말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약간의 언어유희를 좀 하자면,
모든 사람들은 현실주의자다. 타인의 현실 속에 갇혀 있는 현실주의자와 자기 삶의 현실을 신나게 재구성하면서 사는 현실주의자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