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눈물은 이제 그만

1.
나는 야외에서 몸을 움직이는 일들을 좋아한다. 여가시간에 집에서 쉬는 것보다는 등산이나 라이딩을 하거나 밖에서 돌아다니는 걸 더 선호한다. 하지만 특정한 스포츠를 즐기는 건 아니다. 오히려 구기종목 같은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는 것이나 보는 것이나 스포츠에는 무관심한 편이다.
여기저기서 떠들어대지 않았다면 박지성 선수가 속해 있는 영국의 축구팀 이름을 내가 알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난 그가 뛰는 경기를 본 적이 없다. 김연아 선수의 경기도 한번도 안 봤다. 김연아 선수의 얼굴은 오히려 CF에서 더 많이 본 듯.

2.
올림픽이나 월드컵처럼 국가대항전이 펼쳐질 때마다 횡횡하는 내셔널리즘이나 스포츠 쇼비니즘 따위가 영 꼴불견이라 중계방송 같은 건 꼬박꼬박 찾아보지 않는다. 저녁식사 후 가족이 모여서 불가피하게 TV 앞에 앉아 있는 상황에서라면 모를까.

3.
나는 이런 류의 인간이지만, 그래도 한국 선수를 응원하게 되는 건 인지상정이다. 나도 한국의 축구팀이 골을 넣으면 좋아한다. 가끔 아프리카 국가의 팀을 응원하기도 한다. 난 그들의 골 세레모니를 무척 좋아하니까. 걔들은 그 순간을 정말 즐기는 것 같다.

4.
이번 동계올림픽 중계방송을 보면 선수들의 경기를 보고 싶어도 해설자의 광분 때문에 보기 싫어질 정도다. 해설자는 해설을 해야지 왜 지가 응원하다가 흥분하냐 이말이다. 스피드 스케이팅 경기를 보는데 와 정말 리모컨의 무음 버튼을 눌러버리고 싶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해설은 실종되고 '아~ 좋습니다. 좋아요. 보십시오. 대단합니다'가 무한반복된다. 심지어 한국선수의 발동작에 맞추어 '하나둘 하나둘'하고 박자까지 넣어준다. 풉 뿜었다. 올림픽인데다가 소수점 이하의 초 단위를 다투는 스피드 경기이니까 손에 땀을 쥐게 하고 흥분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그건 시청자들 몫이잖냐. 해설자가 똑같이 흥분하고 있으면 되겠냐. 해설자가 경기 중에 흥분해서 응원하고 있으면 해설은 언제 하냐.

5.
한국이니까, 이 정도는 봐줄 수도 있다. 한국에서는 집단적으로 함께 흥분하는 거 좋아하잖냐.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고. 그러나 최소한 공정성을 지켜줬으면 한다. 한국 선수가 외국 선수를 간발의 차이로 앞서서 피니쉬 라인을 들어오면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저 정도면 엄청난 차이다'라고 하더니, 비슷한 차이로 외국 선수가 먼저 들어오면 '(한국 선수가)너무 아깝다. 저 정도면 1위나 다름 없다'고 설레발 친다. 이건 좀 민망한 수준 아니냐.

6.
국제적인 스포츠 대회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외국 선수들은 경기를 즐기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좋은 성적을 내면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고 재미있는 세레모니도 보여주고 하는 장면들이 많다.
그런데 한국 선수들은 너무 비장하다.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면 대부분 눈물을 흘린다. 그동안 말로 표현 못할 고생과 고통, 해냈다는 성취감과 감격이 한꺼번에 몰려왔기 때문이리라. 또는 그동안 받은 소외감에서 비롯한 설움도 있을 거다.
내가 안타까운 건 바로 이거다. 한국의 국가대표 선수들은 죽자사자 운동을 해야 하는 현실. 죽을 힘을 다해 훈련을 해서 올림픽같은 큰 국제대회에서 한방 터뜨려야 어느정도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현실.
1984년 LA올림픽에서 유도 금메달을 딴 하형주 선수가 고향에 있는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한 말은 '어무이 이제 고생 끝났심더'였다.
나는 전문가나 관계자가 아니라서 대충 추측하는 거지만, 한국의 운동선수들이 놓인 현실은 1984년 하형주의 현실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아직도 올림픽 금메달이 인생역전 드라마가 되어야 하는 거냐.

7.
승자독식은 국제대회의 시상식에서 끝나지 않는다. 선수의 장래에까지 승자독식은 이어진다. 청춘을 다 바쳐 운동을 해왔으나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지 못한 수많은 선수들의 미래는 어찌될까. 영화 <킹콩을 들다>에서 역도 국가대표였던 이지봉(이범수 분)은 부상으로 은퇴한 후 나이트클럽에서 웨이터 일을 한다.
나는 어린 선수일수록 다양한 경험과 선택의 기회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두 운동을 좋아하고 재능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시작하지만, 모든 선수들이 김연아가 되고 박태환이 되고 박지성이 될 수는 없다. 학생인 선수들은 최소한 정규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권장되고 보장되어야 한다. 요즘 학교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때 운동부 친구들은 공부와는 완전히 담을 쌓고 살았다. 수업시간에 거의 들어오지도 않았고, 어쩌다 들어오더라도 바로 취침모드.

8.
2000년 시드니올림픽 수영 국가대표였던 장희진 선수는 중학생이었다. 장희진이 학교에 다니면서 훈련을 하겠다고 하자 수영연맹은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하고 연맹에서 제명시켜버렸다. 학생이 공부하겠다는 게 죄가 되는 거다. 장희진은 국가대표 선수이기 전에 다양한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어린 학생이었다. 그녀가 나중에 올림픽에서 메달을 못 따고 은퇴하게 되면 수영연맹에서 그녀의 인생을 책임져줄 건가, 국가가 먹여살려 줄 거냐.
결국 미국으로 건너간 장희진 선수는 전액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서 정치학과 경영학을 전공하게 된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 다시 국가대표로 출전한 장희진 선수는 중위권 정도의 성적을 거두었으나 한국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녀의 꿈은 로스쿨에 진학해서 변호사가 되는 거다.
외국의 운동선수들 중에는 운동을 그만 두고 변호사도 되고 의사도 되고 교사도 되고 하는 사례가 많다. 물론 운동선수들이 은퇴 후에 모두 그럴싸한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국제대회에서 메달 획득 여부에 인생을 쇼부쳐야 하는 현실은 너무 살벌한 거 아니냐 하는 거다.
세계 정상급 선수들을 키우는 일 만큼 중요한 건, 최선을 다 했으나 정상에 이르지 못한 대다수 선수들의 미래에 대해서도 배려하는 시스템이다. 최소한 어린 선수들에게는 공부도 시키면서 운동하게 하자는 거다. 2008년엔가 국가대표 종합훈련원인가 머시긴가 하는 기공식에 장미란과 박태환 선수를 사회자로 세우는 일이 있었다. 이날 박태환은 기말시험을 봐야 했으나 학교측에 적당한 조치를 취하고 기어이 사회를 보게 만들었다고 한다.

9.
지금까지 눈물범벅감동인생역전드라마는 충분히 봤다. 이제는 뛰는 선수들이나 보는 우리나 마음 편하게 스포츠를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금메달 안 따도 선수들 먹고 살길 어느 정도 찾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고, 이겼으면 감격의 눈물보다는 승리감 자체에 푹 빠져서 폴짝폴짝 뛰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

10.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이건희 옹이 내건 포상금 2천만원을 받는다고 한다. 은메달과 동메달은 1천5백만원. 아놔. 황제의 배포가 고작 이 정도란 말이냐. 출전한 모든 선수들에게 기본으로 1억원씩 주고 메달 따면 또 1억, 노력상 1억, 아차상 1억, 감동상 1억, 포토제닉상 1억.... 이 정도는 쏴줘야 하는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