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소주

1.
'소주가 맛있다'는 말을 나는 안 믿는다. 한잔 마시고선 뜨끈한 국물 한숟갈 떠먹거나 하다못해 '크~윽' 소리라도 내지 않으면, 참기 힘들 정도로 독한 소주가 맛있다는 건 말이 안된다. 게다가 소주에 무슨 향이 있나. 아, 레몬소주 같은 게 있긴 하다만.
하지만 소주를 참말로 맛있게 마시는 형이 있었다. 대학 졸업 후엔 만난 적도 없고, 지금은 뭘 하고 사는지도 알 수 없지만, 소주를 맛있게 마시는 사람이었다. 그 형은 소주잔을 한번에 확 털어넣는 법이 없었다. 물을 마시듯 여유롭게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러고 마지막 한방울까지 남김없이 빨아 마셨다. 난 그 형이 소주를 마시는 걸 보면서 '빨아 마신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잔 바닥이 보일 정도로 기울어졌을 때 그 형의 입에서는 '쭈~욱' 소리가 났다. 그러고는 입가가 귀에 걸리도록 환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엔 저게 사람이냐 싶었다만, 여러번 보니까 정감도 생기고 그렇더라. 그 후론 그렇게 소주 마시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2.
조정래 선생이 <태백산맥> 취재를 위해 지리산을 오르내릴 때 고 박현채 선생과 함께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조정래 선생은 박현채 선생과 함께 했던 지리산 현장취재를 술회하면서, 이런 표현을 쓴 적이 있다.
"소주잔에 담긴 달빛까지 마시며 선생의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는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기가 막힌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표현은 머릿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글재간만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다. 조정래 선생은 지리산 세석평전에 앉아서 박현채 선생의 소주잔에 비친 달을 실제로 봤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