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일관성 좀 지키고 살자

살다보니 별 희한한 일도 다 생긴다. 조선일보에 실린 글을 내가 추천하게 될줄이야. 지난달 2일 조선일보 논설주간 송희영의 칼럼인데, 현대건설 매각 입찰에 관한 내용이다. '국민주 방식으로 매각'이라거나 '저소득층에 주식 할인 판매' 같은 대안까지 나온다.
어쨌든 한국의 재벌가들은 염치가 그렇게 없냐. 니들이 말아 잡순 부실기업을 국민 세금으로 살려놨더니, 그냥 미친 척 하고 잡수시겠다고? 하긴 니들은 뼛속까지 그런 놈들이긴 하다만. 공적 자금만 있고 공적 책임은 없는 '비즈니스 프렌들리'가 명박정부 때 갑자기 생긴 것도 아니고.
걸핏하면 시장자유 노래하던 놈들이니까 마음껏 시장자유 누리다가 뒤지는 게 맞잖아. 시장자유에 어긋나게시리 넙죽 공적 자금 받아챙기는 놈들. 하여간 일관성이 없어, 일관성이. 진짜 시장경제주의자라면 '시장자유 우롱하는 공적 자금 웬말이냐' 하는 주장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송희영 칼럼] 재벌에게 뭘 못 줘서 그토록 애가 타나

현대건설 매각 입찰이 진행 중이다. 왕회장의 며느리와 아들이 다투고 삼촌·사촌들은 갈라져 편을 짰다고 한다. 인수한 쪽이 왕회장의 '현대'를 이어갈 정통 후계자가 된다는 그럴싸한 해석도 붙어 다닌다.
구경꾼들마저 현대건설 살리기에 3조원가량 특별 지원된 행적을 잊어버렸다. 그중에는 국민 세금과 마찬가지인 9000억원의 공적자금(정책금융공사 지분)도 들어 있다. 부실에 빠진 10년 세월 동안 국민의 기업으로 주인이 바뀐 줄 몰랐던가. 부도 어음에 쫓겨 숨 못 쉬는 피투성이를 인큐베이터에 집어넣고서 '세금을 더 넣어라' '대출금 늘려라'고 가려가면서 살려놨더니 주인 행세하려는 후손들이 나타났다. 애초에 자기가 상속받도록 돼 있었다고 죽은 창업자의 무덤에서 유언을 새로 녹음해온 듯 모두가 말한다.
대우그룹이 공중 분해된 후 대우조선해양이 중환자실에 뻗어 있을 때 거들떠본 재벌은 없었다. 국민 세금을 수혈받은 후 임직원들이 10년 이상 고생해 세계 2위 조선회사로 키웠다. 그때야 '알짜 회사는 내 것'이라며 재벌들끼리 다투기 시작했다. 정부가 대형 공기업 매각 작업을 지금처럼 추진하는 한, 그냥 지켜보기에는 역겨운 드라마가 연일 방영될 것이다.
회사가 어려울 때는 세금으로 굴리다가 생기가 돌면 재벌에게 선물하는 매각 잔치가 '공정 사회'의 친서민적 불꽃놀이일까. 현대건설이 가쁜 숨을 헐떡일 때 자식들 중 누구도 '제 피를 뽑고 제 살점을 떼어내 살려보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연간 매출 10조원, 국내 랭킹 1위 종합건설사로 번듯하게 올라서자 비로소 혈통을 찾고 적손(嫡孫)을 따진다. 흙탕물 뒤범벅인 양복을 말끔히 다림질해 놓으면 챙겨입고 나가는 사람은 늘 따로 있다. 번듯한 물건만 있으면 정부가 재벌에게 넘기려 하니 재벌은 으레 자기들 차지라고 입맛을 다신다. 대통령의 사돈 재벌은 한때 하이닉스반도체를 인수하겠다고 발표했었다. 회삿돈을 빼내 해외에서 부동산을 불법 매입했던 아들이 각성했는가 싶더니, '인수 자금이 어디에 있다고…'라는 분석과 함께 계열사 주가가 폭락했다. 효성이 무슨 뒷심을 믿고 무모한 인수전을 벌이다 포기했는지는 정권이 바뀐 후에야 풀 스토리가 나올 것이다.
2년 전 여윳돈 없이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하려 했던 한화그룹도 똑같다. 어딜 봐도 6조5000억원의 인수자금을 감당할 수 없었건만, 어디서 무슨 지원 약속을 받았는지 계약서에 서명했다. 재계 랭킹 10위 그룹이 계열사 12개로 성장해버린 거대 그룹을 삼키려다 결국 목젖을 넘기지 못해 토해냈다. 한화의 인수전은 3150억원의 계약금만 떼인 채 끝났다. 담당 공무원들은 '공적 자금을 회수하려면 재벌들끼리 경쟁시켜 가격을 올려야 국민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외환위기 이후 부실기업 회생에 공적자금 168조원을 넣었으나 70조원은 여태 회수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부가 재벌끼리 경쟁시켜 판돈을 올렸다가 빚어진 비극도 있다. 대우건설을 팔면서 2조원 이상 더 받았다고 자랑했으나, 인수전에서 승리한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그 후 경영난에 빠지고 말았다. 대우건설은 이제 산업은행(KDB) 등이 공적자금을 다시 넣어주지 않는 한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웃돈 받고 재벌에게 넘겼던 것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국민들에게 혈세 부담을 안길 전망이다.
입찰에 들어가버린 현대건설은 어쩔 수 없을지라도 나머지 대우조선해양, 우리은행, 하이닉스반도체, 경남·광주은행은 국민주 방식으로 매각, 각각 독립그룹이나 독립회사로 성장시키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포스코, KT, KT&G도 재벌에게 넘기지 않고 국민주 방식으로 독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호주·싱가포르에서도 대형 공기업은 국민주로 팔았다. 호주 커먼웰스(Commonwealth)은행이나 싱가포르 텔레콤은 저소득층에 주식을 매각하면서 5~20%까지 할인 판매했다. 주식 사라고 융자까지 해줬고 잔금을 1년 후에 치르도록 미뤄주기도 했다. 주식을 받으려고 창구 앞에 길게 줄 섰던 서민들은 그 후 주가 상승으로 적지 않은 보상을 받았다.
멀쩡한 회사를 재벌에게 넘길 때마다 잡음 없이 끝난 적이 없다. 최고 권력자의 측근과 동창, 정치권 실력자들까지 거간꾼으로 등장, 떡고물을 둘러싸고 다툰다. 이대로 가면 재벌에게 뭔가 선물하지 못해 안달하는 정권이라는 말을 들어도 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