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좋은 자세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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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좋은 자세 '아님 말고'

고만고만한 또래의 젊은 남자들이 징집당해 모이고, 먼저 온 순서대로 서열이 정해지며, 서열이 높을수록 어줍잖은 권력을 쥐고 아래 서열에게 뭐든지 할 수 있게 되는 바로 그곳. 현대성은 고사하고 근대의 합리성조차 들어오기 전에 모조리 반납했어야 했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곳. 거기서 나는 성선설을 선택했다. 물론 맹자의 성선설 같은 동양철학을 고민한 결과는 아니고. 저들은 원래 착한 사람들인데 군대라는 특수조직이 악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거라고 믿기로 했다는 거다. 맹자의 비유대로 물은 원래 아래로 떨어지는 본성을 갖고 있는데 외부의 힘에 의해 산위로 거슬로 올라가기도 한다. 그러니까 '외부의 힘'을 선한 것으로 바꿔놓으면 원래대로 선한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나름대로 논리적인 전개.라고 하지만 중2 수준의 단순한 믿음이다.

물론 시키는 것 외에 딴짓은 허용되지 않는 졸병 시절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나보다 아래 졸병에게 "야, 나랑 있을 땐 편하게 있어도 돼"라고 속삭이는 것 뿐. 나와 입대동기들 서열이 꽤 높아졌을 때, 동기들이 힘들여 잡아놓은 군기라는 걸 내가 가서 빼놓곤 했다. 그렇다고 동기들을 무시한 건 아니고, 나는 나대로 말랑말랑한 분위기를 만들어줬다. 나라는 인간이 군기와는 거리가 멀어도 지구 한반퀴 돌 정도로 멀다는 걸 동기들도 이해해줬다. 참 고맙게도. 여하간 내가 분대장이 되었을 때 우리 내무반은 구타와 폭언 없는(당연하지만 현실에서는 매우 휘귀한) 곳이 되었고, 이등병들에게는 천국이고 고참들에게는 '저게 군대냐'하는 그런 곳이 되었다. 오래 전 글을 발췌한다.

대한민국의 하늘은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인 줄로만 알았던 우리의 이등병은 축구를 할 때마다 살벌한 욕을 들어야 했다. 마음의 간절한 부탁을 단호히 거절한 육신 때문이다. 야간 대학에 다니는 소대장의 레포트를 대신 써주고 작업 몇 번 열외 한 것, 웅변대회 나가는 고참에게 원고를 써주고 청소 몇 번 열외한 것, 중대장 대신 글 몇 번 써주고 포상휴가 간 것 등을 빼면 나름대로 정직하게 복무했다. 분대장이 되었을 때 우리 분대는 알아주는 오합지졸이었다. 전입 온 신병들 중에 위험하다싶은(?) 놈들은 모두 우리 분대로 왔다. 중대장과 소대장이 나의 통솔능력을 믿었다기보다는 사고예방 차원이었음이 틀림없다. 축구면 축구, 작업이면 작업, 훈련이면 훈련 무엇 하나 남보다 앞설 줄 모르는 겸손지덕의 병사들. 낮이든 밤이든 초소만 나가면 졸기 시작하는 못 말리는 녀석, 청소하다가 고참이 욕했다고 소각장에 꼭꼭 숨어버리는 녀석 등등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녀석들과 함께 결코 평범하지 못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전역하던 날 아침, 눈물을 흘린 후임병까지 둔 걸 보면 그리 악독한 고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시덥잖은 군대이야기를 길게 한 까닭은, 나는 그곳에서 나름대로 삶의 원칙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어떠냐는 건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간은 선할 때도 있고 악할 때도 있다. 내가 전혀 무섭지 않은 고참이라는 걸 알게 된 후임병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내 앞에서는 선한 미소를 보이지만 뒤돌아서면 무능하다고 생각하거나 나 제대할 때까지 편하게 지내면 그만이라며 즐기는 쪽. 그리고 나의 뜻을 지지하며 고마워 하고 심지어 "저도 나중에 조 병장님처럼 웃음으로 후임들을 이끌 수 있는 분대장이 되겠습니다"라는 포부를 밝힌 병사까지.

결국 내가 어떤 생각과 믿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든지 상관없이 결국 타인들은 자기 방식으로 산다는 거다. 내가 성선설을 믿든 성악설을 믿든, 어떤 사람은 선하고 어떤 사람은 악하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선할 때도 있고 악할 때도 있다. 내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상대방에게 선한 행동을 하더라도,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나에게 선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게 마냥 좋은 일은 아니다. 그건 나의 의도와 행동이 선하냐 아니냐에 달린 게 아니라, 오로지 상대방의 태도와 방식에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진심으로 고마운 일이고, 누군가에게는 자기 이익에 부합하는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기준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게 좋다. 타인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이냐 하는 거다. 선하냐 악하냐 뭐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성정을 탐구하고 이해하며 거기에 어울리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흥이 넘치는 사람은 잘 노는 것이 중요하고,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은 산행을 하거나 미술관을 가는 게 더 중요하다. 놀기 좋아하는 사람을 도서관에 앉혀놓는다면 얼마나 고역이겠는가. 부끄럼 많은 사람에게 EDM이 귓청을 때리는 클럽에서 신나게 놀아보라고 하면 또 얼마나 진땀 빼는 일이겠는가.

젊음이 가기 전에 클럽에서 죽도록 놀아봐야 하지 않느냐는 말에, 미술관의 한 작품 앞에서 몇십분이고 서서 감상하는 짜릿함을 느껴보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는 말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 내가 클럽에 가고싶냐, 미술관에 가고싶냐 스스로 묻고 결정하면 그만이다. 상대방이 하는 말은 상대방에게나 해당될 뿐이다. 물론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도 있을 것이다. 그건 그때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중요한 것은 오직 자신이다.

상대방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는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기준이 될 수 없다. 상대방에게 호감이 있다면 호의를 나타내면 그걸로 충분하다. 누군가에게 잘해주고 싶다면 잘해주면 된다. 내가 호의를 베풀었으니, 내가 잘해주었으니 상대방도 나에게 그럴 것이라는 믿음은 가질 필요가 없다. 만약 상대방도 그러하다면 참 좋은 일이지만, 그러지 않다고 해서 나쁜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해야 할 일을 당당히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 상대방의 반응에 좌지우지하는 나약함은 더이상 겪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인정욕구나 보상심리라는 건 쉽사리 접어둘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지 않다면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 많은 사람들이 빠져들지 않았을테니까. 서로에게 인정과 보상을 애걸하며 타인의 인정에 자기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게 우리의 무기력한 모습이기도 하다.

이것을 벗어나는 인생의 자세 중 하나는 '아님 말고'다. 이건 무책임과는 전혀 다르다. 인생의 주인만이 '아님 말고'라며 책임질 수 있는 거다. 노예가 어찌 '아님 말고'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 뜻대로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결과가 별로이거나 안좋더라도 낙심하거나 타인의 눈치를 보지 말고 '아님 말고' 하면 된다. 그리고 다시 내 인생을 살면 된다. 성공보다 실패가, 승리보다 패배가, 기쁨보다 고통이, 사랑보다 갈등이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나는 인생을 비관하지 않는다. 수도 없이 '아님 말고'를 중얼거리며 춤추듯 내 인생을 내 뜻대로 살려고 한다. 물론 안되는 게 더 많긴 하다. 그럼 뭐 어때, 오늘도 아님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