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혼자서 가라

    풍족한 생활이란 걱정 없이 원하는 만큼 소비하는 것이라고 믿게 되면 '좋은 삶'을 고민하는 시간은 희소해진다. 공동체가 소멸되어가는 대중사회에서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가 우리의 삶을 규정한지 오래다. 하지만 소비로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으로는 행복을 유지하기 어렵고 스스로 내면을 느낄 수 없다. 소비는 얼핏 나를 위한 행위인 듯 보이지만, 사실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이타적 행위다. 욕심 나는 내 삶과 일상에 큰 불만이 없다. 하지만 갈수록 진중한 대화를 나눌 사람이 제한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아쉽다. 같이 노는 사람들은 있어도, 함께 생각을 나누고 내면을 보여주며 때로는 격한 논쟁도 불사하는 그런 관계를 새로 맺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가끔 외로움과 권태를 느끼는 까닭이다...

    속사정 1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듣는 것이 모든 걸 말해주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데 대단한 지혜나 학습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우리는 곧잘 잊는다. 몰라서가 아니라 그게 편해서다. 보이는대로 단정하고 들리는대로 결론내는 일은 무척 쉽다. 뇌과학에서는 인간의 뇌는 최대한 빨리 상대방을 파악하기 위해 직감에 의존한다고도 한다만. 저 녀석이 내편인지 아닌지, 그러니까 나한테 해가 될 놈인지 이로울 놈인지를 빨리 판단하기 위한 일종의 생존 전략. 이러한 뇌의 전략에 속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성찰과 반문'이라고 뇌과학자 장동선은 말한다만. 그건 그렇고. 우리는 상대방의 속사정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무관심하면서, 겉으로 보고 듣는 것만으로 이러저러할 것이라고 쉽게 단정한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러..

    당신은 얼마짜리입니까?

    "이거 얼마짜리냐?" 한국 사회는 '얼마짜리냐'는 질문에 무척 익숙하다. 나는 일상에서 그 질문을 많이 겪는다. 내가 어떤 새로운 물건을 갖고 있을 때 사람들은 묻는다. "그거 얼마야?" 대부분 이것이 첫 질문이다. 첫 질문이 아닌 무척 드문 경우에도 결국엔 이 질문이 빠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건 뭐가 좋냐', '네 마음에 드냐', '이걸로 뭘 하고 싶냐' 등과 같은 좀더 인간적인 질문을 우리는 왜 잊어버린걸까?(나는 그걸 잊어버렸거나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자리를 '얼마짜리냐'는 궁금증이 차지했다고 믿는다.) 물론 '얼마짜리냐'고 묻는 사람들이 특별히 돈을 밝힌다거나, 황금만능주의에 빠진 사람들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묻는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그거다.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