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미완의 5·18

    내가 뜨거웠던 시절, 5·18은 항상 거리 위에서 최루탄과 짱돌 속에서 외치는 이름이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시험에 나오는 것)만 알았던 대학교 1학년 시절, 그 해는 전두환과 노태우 등 학살자들에 대한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해였다. 그해 여름,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공소권 없음'이라고 발표했고, 광주는 난리가 났으며, 거리는 '학살자 처벌'과 '5·18 특별법 제정'이라는 구호로 덮였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은 특별법 제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전두환과 노태우 등 학살 주범들이 법정에 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곧 특별사면되었다.처벌과 단죄는 턱없이 불충분했고, 진상규명은 '군사기밀'과 양심선언 부재 등을 이유로 미완에 그쳤다. 제대로 이뤄진 것 없이 5·1..

    5·18

    5·18 28주년이다. 수백장의 사진을 찍었건만, 흡족한 사진 한장 없다. 우리의 이동과 기념사진(!)을 책임진 성욱이 형에게 'special thanks'한다.

    고 윤한봉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윤한봉 선생님이 별세하셨다. 오늘 오후 문자메시지로 부고를 받았다. 고인을 처음 본 때는 2000년 5·18 민중항쟁 주간이었다. 비엔날레 공원에서 김남주 시인의 시비 제막식이 있었다. 당시 인터넷한겨레 하니리포터였던 나는 5·18공동취재단과 함께 제막식 행사를 취재하고 있었다. 송기숙 교수를 비롯해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나와서 제막을 거행했다. 그들이 시비를 덮고 있던 하얀 천을 끌어내리자 시비가 모습을 드러냈고, 모두 박수를 쳤다. 그러고나서 그들은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웬 왜소한 남성이 홀로 남아서 그 커다란 하얀 천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남들은 다 양복 입고 나왔는데, 그 남성은 허름한 점퍼에 하얀 운동화 차림이었다. 그는 하얀 천을 들쳐 메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신기했다. 제막에 참여할만한 ..

    김영삼씨에게 감사할 일은 없다.

    5·18기념재단과 5·18 제 단체가 김영삼씨(한국의 전직 대통령)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김영삼씨가 '광주 시민의 명예회복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므로' 감사패를 준단다. 그리고 김영삼씨는 처음으로 5·18국립묘지를 참배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김영삼씨는 1988년 노태우와 '3당합당'이라는 야합을 맺고 국민이 만들어낸 여소야대 정국을 뒤집어버린 사람이다. 그리고 IMF 사태를 초래해 한국의 경제를 초국적 자본에게 상납하고, 수많은 인민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장본인이다. 김영삼씨가 대통령에 재직하고 있을 때 5·18 특별법이 제정되고 전두환과 노태우 등이 법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김영삼씨의 '공적'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5·18특별법 제정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