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udy

거대한 두통

요즘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홍기빈 옮김)을 읽고 있다. 통 수험서만 보다가 간만에 책 다운(?) 책을 읽자니 머리통이 아프려고 한다. 임용시험이 끝나고 약 15만원 어치의 책을 주문했는데, 일빠로 집어든 책이 '거대한 전환'이다. 가장 궁금했던 책이라 별 갈등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6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과 경제학 책이라는 사실을 너무 쉽게 본 것 같다. (책값도 ㅎㄷㄷ하다.) 시험공부하느라 머리털 쥐어뜯으며 봤던 경제학원론처럼 눈알 돌아가게 만드는 그래프와 수식이 판 치는 그런 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만만한 책은 역시 아니다. '거대한 전환'을 읽다가 거대한 두통을 앓지 않을지 걱정스럽다.

중세시대부터 19세기 전후까지 역사적 사실들을 종횡무진하는 바람에, 이게 경제학 책인지 문화사 내지 역사서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그래도 졸음을 내치게 하는 색다른 통찰이나 자질구레하지만 잘 외워두면 유용하게 써먹을 만한 이야깃거리들이 많다.

홍기빈이 '옮긴이 해설'이라고 해서 붙여놓은 부분에서 맬서스의 인구법칙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몰랐던 내용들이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다.

맬서스에게 인간은 성욕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이다. 잘 먹고 여유가 있으면 되는대로 섹스를 하고 자식을 낳게 된다는 거다. 그런데 자연은 희소성의 원리에 제한받기 때문에 무한히 늘어나는 인구를 다 먹여 살릴 수 없다. 인구는 체증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체감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식량 생산량을 넘어서는 인구는 모두 굶어죽을 수밖에 없다는 유명한 이야기. 여기까지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고.
결국 인구를 줄이긴 해야 하는데, 맬서스는 성인들이 성욕을 절제하여 산아를 제한하는 것은 실현 불가능하다고 봤다. 성욕을 완전히 참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맬서스가 주장한 방법은 이미 존재하는 인구를 제거하는 것이다. 전쟁이나 전염병, 범죄, 학살처럼 대규모로 인구를 줄일 수 있는 확실한 방법들을 적극 조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시궁창과 습지를 조성하여 뇌염모기를 번식시켜야 한다는 주장까지 했다고 한다. 이건 좀...
이러한 인구법칙에서 임금 철칙이란 게 나온다. 임금이 올라가면 노동자들은 잘 먹고 여유있는 생활을 하게 되어 섹스에 몰입하고 자식을 많이 낳게 되므로, 노동시장에서 공급이 증가하고 임금은 떨어지게 된다. 일정 수준 이하로 임금이 떨어지면 노동자들은 굶주리고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어 왕성한 섹스를 할 수 없게 되므로 노동자의 머릿 수는 다시 감소한다. 노동의 공급이 감소하니 임금은 다시 오르게 된다.
여기에 임금기금설이라는 게 붙는다. 한 사회의 전체 생산에서 노동자들에게 주어지는 몫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임금을 올려봤자 노동자들이 받는 총량의 수준에서는 변화가 없게 된다는 거다. 임금의 상승은 곧 자본의 이윤을 줄이는 것이므로, 투자는 줄어들고 이는 총 생산량의 감소로 이어진다. 결국 노동자들이 구입할 수 있는 상품의 양은 줄어들 수밖에 없으므로 실질임금은 임금 상승 이전과 다를 바가 없다는 논리다.
임금 철칙과 임금기금설을 합쳐보면, 한 사회의 임금 수준은 호황이나 불황과는 무관하게 최소 생계의 수준에서 고정되어 있고, 이를 통해 노동자들의 생식을 제한하여 노동자의 수를 저절로 조절하게 된다는 '철의 법칙'이 탄생한다는 거다. 홍기빈에 따르면, 이러한 인구법칙에 대해서 마르크스는 '인류에 대한 모독'이라고 한 적이 있단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무식한 발상이 21세기에 우리가 경제학원론이라는 책에서 배우는 고전학파 경제이론들의 뿌리가 되는 기본적인 사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지 않냐 이말이다. 그러나 폴라니의 말마따나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이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잔혹한 악마같은 존재가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폴라니는 빈민들을 구제하려고 했던 그들의 진실성을 의심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다만 빈민들이 그러한 운명에 처하게 된 것에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의 이론이 상당한 원인이 되었을 뿐.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