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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킹콩'이 되고 싶어

나에겐 '은사'가 없다. 유치원 1년,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 4년, 대학원 3년 하여 나의 학력은 장장 20년간 쌓여왔으나 '은사'라 할만 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내가 건방진 건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거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20년이라는 엄청난 세월동안 '학교'를 다녔는데 마음에 남아 있는 선생님 한명 없다니! 물론 '저런 작자가 선생이라니!'하는 인간들 몇은 마음에 남아 있긴 하다만.
나는 체질상 누군가를 부러워 하는 데 별로 재주가 없다. 그냥 남이사 뭐라든 나 잘난 맛에 사는 편인데, 내가 부러워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은사'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참고로 노래 잘 부르는 사람, 음식 잘 만드는 사람도 부러워 한다.)
아는 인간들이 스승의 날을 맞아 고등학교 때 담임 쌤을 찾아뵙는다고 하면, 겉으로는 '뭘 그렇게까지 하냐'고 퉁을 놓지만, 속으로는 졸라 부럽다. 나도 학창시절 담임 쌤 만나서 소주 마시면서 정겨운 시간 보내고 잡단 말이다. 그러나 내가 만난 쌤들은 미칠 듯이 평범하거나 돌아버릴 듯이 악마같은 분들이었다. 쩝.

서설이 길었다.
영화 <킹콩을 들다>를 뒤늦게 봤다. 막 개봉했을 때 누군가 재미있다고 추천했는데, 내가 극장 갈 여유가 어딨냐 하고 미뤄둔 걸 이제서야 본 거다.
진부한 스토리에 진부한 캐릭터가 난무하는 그저 그런 영화가 될 뻔 했으나, 이게 사람 혼을 홀딱 빼놓을 정도로 감정이입 제대로 시켜준다.그래서 영화 보고나면 어깨놀이가 뻐근할 거다. 역기를 드는 장면에서 당신도 같이 역기를 들고 있게 될테니까. 힘을 내라고! 하며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있을테니까.
조안이 원래 저렇게 연기를 잘했나 싶다. 스크린 안으로 들어가서 꼬옥 안아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6명의 소녀 역사 모두 정말 대단한 연기를 보여준다. 정확한 연기력을 보여준다기보다는, 뭐랄까 그냥 보는 사람 마음을 확 잡아끄는 맛이 있다. 과잉되지 않으면서. 보성 사투리의 어색한 발음 따위는 전혀 문제 삼지 않아도 될 정도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건, 내가 꿈꿔오던 교사의 로망을 그대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말하면, 가난하고 구질구질한 생활의 구렁텅이에서 뭔가 손에 잡히는 꿈을 보여줄 수 있다는 거. 그거다.
그리고 이건 좀 유치한 로망인데, 난 교사가 되면 꼭 한번은 아이들을 불러다가 내 손으로 밥을 해서 먹이는 짓을 해보고 싶다. 영화에서는 이치봉이, 점심을 굶고 학교 뒷편에서 학생들이 안 먹고 버린 우유를 찾아서 몰래 먹고 있는 영자를 데리고 같이 점심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부득 부득 밥 먹었다고 우기는 영자에게 '나 혼자 먹기 싫어서 그런다'며 모른 척 해주는 센스까지.
오갈 데 없는 영자가 잠 자고 밥 먹을 수 있는 '합숙소'를 만들기 위해 교장과 적당히 거래하는 이치봉의 모습도 좋았다. '합숙소'를 가장한 '집'을 마련해주는 거다. 티 안나게 구체적 도움을 주는 거. 학창시절 '킹콩'을 만나지 못한 나는, 그래서 내가 '킹콩'이 되고 싶은 거다.

<국가대표>는 몇 번 웃고 끝나는 영화였는데, <킹콩을 들다>는 웃음과 감동을 담백하게 남겨준다.

교육감으로 출연한 변희봉이 이치봉에게 이런 말을 한다.
"스승은 제자들의 영혼에까지 영향을 미쳐, 말하자면 아무도 그 영향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