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불안은 개나 줘버리고

청년인턴이라고 가카가 하사하신 은혜로운 알바를 하던 시기에 썼던 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격언을 다시 새기며. 그리고 다시 '위로'를 시작한다.

2009.06.15

정년퇴임을 앞둔 직원이 사무실 밖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다. 나는 고개를 꾸뻑 숙이고 옆에 서서 담배를 문다. 그가 말한다. (내가 인턴을 그만 둘 때 그는 '아따, 우리 원종이가 잘 되믄 내가 사위 삼을라고 했는디...' 했다. 빈말이어도 기분 좋았다.ㅋ)

"자네도 힘들제잉? 사회생활이란 게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란 말이시...."
멋진 말이긴 한데, 느닷없기도 해서 잠시 뻘쭘하다가 나는 짧게 반응을 보인다.
"아, 네...."
하지만 속으론 이렇게 말했다.
"저도 취직이란 걸 해서 '나를 잃어버리'기라도 해봤으면 좋겠네요."

생각해보니 그렇다. 인생이란 거. 무언가를 얻으면 다른 무언가를 잃기 쉽다는 거다. 싱겁긴 하지만 사는 것이 원래 그런 모양이다. 아! 물론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는 단순 셈법은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결국 선택이라는 거지. 선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선택의 순간, 선택 이후의 또다른 선택.... 그래서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광고카피는 역사에 길이 남을 격언이기도 하다.

모든 선택의 시작과 끝에는 불안이 존재한다. 불안에 떨면서 선택을 망설이고, 선택하고나서도 불안에 시달린다. 불안은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과 같이 살아가면서, 사회를 이루고 살 수밖에 없게 되면서 불안은 그림자처럼 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대부분의 불안은 '내 안의 나'와 '내 밖의 나' 사이에 생기는 괴리 때문이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명이 발전하고 사회가 정교화되면서 욕망은 늘어나고, 더욱 쾌적하게 충족하게 되는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에 대한 욕망은 점점 모호해지는 것 같다. (여기서 자본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욕망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도록 한다는 오래된 명제를 상기할 필요도 있다)

많은 걸 희생하면서까지 자식을 사교육에 내모는 부모들을 욕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 자신도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사례에서 보듯이 우리는 사회가 주입하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들다. 내가 원한다고 생각해서 선택한 것들이 알고보니 타인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선택한 것은 아닐까 하는 것.

'내 밖의 나'는 내가 아닌 타인들의 시선에 의해 형성되고 만다. '내 안의 나'는 모호한 욕망들의 틈바구니에서 시나브로 실종되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경계의 안에서 '주어진'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경쟁하고 쟁취하면서 불안을 떨쳐내려고 한다. 경계 안에서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앞섰거나 적어도 남들과 비슷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야 불안하지 않다고 믿게 된다. 가끔은 그것이 행복이라고 여기기도 한다.(누군가에게는 진짜 행복이기도 할 것이다. 행복은 매우 보편적인 의미로 쓰이면서도 각자의 삶에서는 지독하게도 개별적인 것이므로)

그러나 경계 안에서 남들보다 위에 올라섰다고 해서 불안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또다른 불안에 시달리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남들보다 앞섰다는 것과 뒤쳐졌다는 것은 불안감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다를 게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도 어차피 불안한 것이니 상관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많은 철학자와 예술가들(나는 통칭하여 '자유를 찾아가는 영혼들'이라고 한다)은 말한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

세상의 경계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경계 바깥에도 또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즐기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욕망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나는 여기에서 '욕망'이라는 말을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실현하려고 하는 정신적-육체적 의지'라는 뜻으로 사용한다.(그냥 내 맘대로 정의이니까, 너무 불만 갖지 마시라)

문제는 우리가 욕망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욕망을 생성할 줄 아는 능력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그 문제의 중심에는 항상 제도가 있다는 점 잊지 말아야 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학교다. 학교는 욕망을 즐겁게 대면하는 방법보다는 억제하고 통제하는 방법을 교육한다. 그래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욕망을 어떻게 조절하고 생성하느냐 하는 것은 금기시된다. 제도의 본성은 언제나 틀 안에 가두는 것이다. 그러한 필요에 의해 만든 것이 제도다.

경계 안의 사람들은 경계 밖으로의 일탈을 불안하게만 여긴다. 반대로 경계 밖으로 걸어나간 사람들은 경계 안의 사람들이 무한반복하여 겪고 있는 불안의 실체를 비로소 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어떤가? 나는 경계 안에 있다가 가끔 경계 밖으로 톡 튀어나갔다가 다시 경계 안으로 기어들어가기를 반복한다. 사실 경계 밖으로 튀어나갔다기보다는 한 쪽 다리를 은근슬쩍 경계 밖으로 내밀었다는 게 솔직한 말이다. ㅋㅋ 그것도 과감하게는 못하고, 경계의 안팎을 어칠비칠 돌아다니는 게 나다. 아마도 나에게 어울리는 것은 경계의 안이나 밖도 아닌 경계의 울타리에 걸터앉아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요상한 생각이 불쑥 들기도 한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는 행복하고 싶을 뿐이고,
취직은 안되고 있을 뿐이고,
임용시험은 암울해져갈 뿐이고,
그래도 나는 내가 좋을 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