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통해야
opinion

말이 통해야

광범위한 사례연구에 의하면 결혼에 대한 만족도는
성격, 지능, 학력, 수입, 외모 등과는 전혀 관련이 없답니다.
정서적으로 친밀하고 대화가 잘 통할 수 있는 부부의
결혼 만족도가 제일 높다네요.

하지만 이런 유의 결론에는 늘 크고 작은 이견(異見)이 뒤따릅니다.
돈을 많이 벌어 오면,
한예슬만큼 예쁘면,
모태범처럼 명랑한 성격이면,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직업을 가졌으면...
친밀하지 않고 대화가 안 통한들 그게 무슨 대수냐는 거지요.
그 정도는 능히 참고 살 수 있다 생각합니다.
착각(錯覺)입니다.

자동차 매장에서 디자인, 성능, 가격을 까탈스럽게 따진 뒤
아직 운전 면허증이 없다고 얘기하는 격입니다.
성능 뛰어나고 디자인 마음에 들고 가격 적절하다면
그깟 면허증이야 무슨 문제냐는 거겠지요.
명백한 착각입니다.
자동차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주행 모드이니까요.

주변부에 있는 극히 일부를 전부로 착각하면
내 삶의 만족도는 놀랄 만큼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혜신의 그림에세이 2010-03-03>

삼십대가 되면 좋든 싫든 결혼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단순히 결혼을 해야 되냐 말아야 되냐 이런 건 아니고. 결혼하기 싫다는 생각은 안해봤으니까.
이십대 때부터 언제보다는 어떻게가 더 중요한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해왔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 없다. 오래 전, 눈뜨고코베인이라는 밴드의 '말이 통해야 같이 살지'라는 곡에서 나는 결혼에 대한 중요한 원칙을 발견했다.
말이 통해야 같이 살지 / 너 때문에 맨날 노래를(고백을) 하는 / 나는 언제쯤
이게 가사의 전부다. 말이 통해야 같이 산다. 참고로 눈뜨고코베인의 드러머가 바로 장기하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그 장기하.

가난은 불편한 것이지만 문제가 되지 않게 사는 방법은 많다. 반면에 부유하지만 말이 안 통하는 것은 최악의 문제다. 고 김남주 시인은 '사랑은 사과 한알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고 했다. 나는 사과 한 알을 두 알로 불려서 각자 한 알씩 가져가는 사랑보다는 사과 한알 둘로 쪼개 나눠 갖는 사랑을 더 신뢰한다.

삼십대가 되면서 주변에는 결혼한 사람과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 태반이다. 내가 아는 삼십대 중 비혼으로 살겠다고 한 사람은 지금까지 딱 2명 뿐이다. 결혼했거나 결혼하기로 한 커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놀랍게도 한결같이 듣는 말이 있다. 그들은 한숨 섞인 소리로 말한다.
'결혼은 현실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당연한 거 아닌가. 속으로 그런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사과 한알을 나눠 갖는 실존적 행복보다는 '사과 한알로는 부족하다'는 계산의 문제를 더 중요한 현실로 믿는다고 느껴진다.
사과 한알을 둘로 쪼개 나눠갖는 일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오랜 세월을 버티며 기다려야 가능해지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매우 현실적인 일이다. 새로운 사과 한알을 구하는 일도 큰 힘이 드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사과 한알을 두알로 불리고, 두알을 세알로 불리는 일은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이며, 원래 있던 사과 한알마저 썩힐 수 있다.
말이 통한다면 사과 한알로도 행복은 쉬운 일이 된다.

가카가 다스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불행해진 까닭은 가카와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인 것과 같은 이치다. 가카가 사과 한알이 아닌 트럭째 갖다주겠다고 약속했음에도 우리가 불행한 까닭은 가카와는 도무지 말이 안 통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하긴 인간이 설치류 동물과 말이 통할 리가 없지.

P.S. 연애에는 영 소질 없는 Y는 '사과 한알 다 줄 수도 있는데'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러나 Y는 여전히 혼자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