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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는 화폐로 하는 것인가?

우리 시대의 연애가 썰렁해진 건 무엇보다 '차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수준은 물론 학벌, 가족관계, 거기다 외모까지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 어떻게 열정이 폭발하겠는가. ...사랑에 빠지기에는 둘 다 몸이 너무 무거운 탓이다. 자가용과 아파트, 그럴듯한 직업과 연봉 등이 척도가 되는 한 몸은 한없이 무거워진다. 동시에 욕망은 잠식되어간다. 화폐야말로 욕망의 흡혈마왕이라는 것, 잊지 마시라. 그러니 이 화폐가 쳐놓은 저지선을 뚫지 않고서야 어찌 사랑의 열정을 누릴 수 있겠는가? ...쇼핑은 자가용에 대한 욕망과 포개진다. 쇼-쇼핑-자가용, 이렇게 이어지는 회로를 차단하는 것도 화폐 권력과의 대결이라는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틈나는 대로 걸어야 한다. 아니면 자전거를 타거나. 사랑이란 무엇보다 생명의 활기로 표현된다.
-고미숙의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에로스> 중에서-

나 역시 오래전부터 자동차보다 자전거와 보행이 연인들에게 더 우월한 수단이 된다고 믿고 있다. 다만 고미숙의 지적에 덧붙여 자동차가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물리적 환경도 연애에는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자식을 키우게 된다면 권유하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이런거다.

"개똥아, 고급 자동차를 갖고 있는 사람보다는 자전거와 산책을 즐기는 사람과의 연애를 조심스레 권해본단다. 연애가 얼마나 즐거운 것이고 사람을 들뜨게 만들며, 또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지 온몸으로 깨닫는 데에는 자동차 안보다는 사방이 트여 있는 자전거와 산책이 더 훌륭한 수단이거든. 자동차는 연인들의 대화와 접촉, 시야를 제한한단다. 연인 사이의 친밀감을 높이는 데에는 함께 손잡고 걷는 것 만큼 좋은 게 없어. 비가 올 때 자동차가 있다면 비에 젖는 불편함은 겪지 않을 수 있어. 하지만 함께 우산 쓰고 걷는 건 불편함 따위는 전혀 문제가 안되는 애틋함을 준단다. 젊은 시절 연애에 자가용이 중요해지는 건 너무 재미 없지 않을까? 네 생각은 어때?"

작년이던가, 한겨레21은 커버스토리로 88만원 세대의 연애풍속도를 다뤘다. 슬픈 이야기다. 남자친구와 데이트하는 시간조차 시급 3천 얼마로 환산해서 생각하게 되어버렸다는 여대생도 있었다. 대학 등록금을 대출받아야 하고, 대출금 갚기 위해 몇 개의 알바를 뛰면서 취업을 위한 스펙관리도 해야 하고, 그런다고 졸업 후 취업이 보장되기는커녕 여전히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실업자 신세가 될 수밖에 없는 20대들은 '연애는 사치'라는 믿음을 강요당했다.
20대를 88만원세대로 전락시킨 구조적 문제에는 백번 동의한다. 그렇다고 해서 20대에게 연애는 사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0대들이 스스로 '연애는 사치'라고 믿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건 현실이 되어버린다. 오히려 그럴수록 20대들은 연애를 해야 한다.
대신에 돈을 쓰는 연애가 아니라 마음과 머리를 쓰는 연애를 권한다. 소비사회가 강요하는 연애의 방식과 수단에는 단호해지기 바란다. 단순히 20대의 주머니가 가난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돈을 들여 상품을 소비하는 방식으로는 근사한 연애를 오래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 돈 벌면 폼 나게 연애하겠다는 생각 말고, 오늘 그 사람과 만나서 어떤 대화를 나누고 어떤 매력을 보여줄 것인지를 고민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공부하고 연구하고 상상력을 동원하면 큰 돈 없어도 근사한 연애가 가능하다. 둘이 머리를 맞대고 돈 없이 즐길 수 있는 데이트를 개발해볼 것. 개발과정 자체가 이미 짜릿짜릿한 연애다.
돈의 부족이 아니라 상상력과 성실함의 빈곤을 탓할 줄 안다면, 20대의 연애는 사치가 아니라 고단한 청춘의 시절을 비추는 한줄기 햇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화폐를 거부하고 상상력을 택할 것. 롸잇 나우!